여성의 무한한 모성애에 바치는 헌사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극단적인 인물과 극단적인 표현으로 가득찼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나쁜교육’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 등을 거치면서, 한때 악동이라고 불리웠던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이제는 너무나 착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최근 영화를 보고 나오면, 감정이 모두 정화가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감동과 따뜻한 정으로 넘쳐 난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변하게 했을까? 나이가 먹는다는 뜻일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변화에 나쁜 징조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악동 시절의 그의 엽기적인 표현이나 캐릭터들이 그리워질 때도 있다. 그러나 질풍노도의 삶의 풍상을 모두 거쳐온 현자의 지혜가 그의 영화 속에는 따뜻하게 담겨 있는 것을 싫어할 이유는 없다. 그 과정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현실과의 타협이 그의 영화에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페넬로페 크루즈에게 올해 칸느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 주었고, 또 각본상도 수상한 알모도바르의 최신작 ‘귀향’은 알모도바르 후기 영화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의 영화 어느 구석엔가는 꼭 박혀 있던 게이나 레즈비언 같은 동성애자도, 성 정체성에 혼돈을 갖고 있는 인물들도, 여기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근친상간이 중요한 소재로 채택되고 있다. 그러나 이작품의 진정한 주제는 그게 아니다.

이 영화는 여성의 무한한 모성성에 바치는 알모도바라의 헌사다. 어머니와 딸, 그 깊고 깊은 애증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우리는 눈시울을 적시게 된다. 알모도바르의 다른 영화에 비해 유머 감각도 뛰어나고 또 페넬로페 크루즈의 노래도 들어 있다. 영화의 제목대로 알모도바르는 이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어디로? 그곳은 그의 삶이 처음 시작되었던 곳, 어머니의 자궁 속이다. 그가 어린 시절 함께 자랐던 친척들과 마을의 이웃 사람들이다. 그는 그의 삶이 가장 편안했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딸과 함께 살고 있는 라문다(페넬로페 크루즈 분)는 남편이 실직했다는 말을 듣는다. 그것은 앞으로 라문다가 일요일에도 나가서 일해야 하는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남편은 별로 걱정이 없는 표정이다. 집안 살림을 똑소리 나게 잘하는 라문다가 있기 때문이다.

사춘기의 딸이 다리를 벌리고 소파에 앉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는 남자. 그리고 며칠 뒤, 직장에 나갔다가 돌아온 라문다는 버스 정류장까지 딸이 나와서 비를 맞으며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발견한다. 이상한 생각이 든 라문다는 집에 들어와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친 딸이 아니라면서 처녀티가 나게 성장한 딸을 아버지는 겁탈하려고 했고, 딸은 부억칼을 들고 자신을 방어하려다가 실수로 그를 찔렀다. 부억에서 남편의 시체를 발견한 라문다는, 마침 장사가 안되어 레스토랑을 비우게 되었으니 열쇠를 맡아달라는 옆 집 주인의 부탁을 듣고, 레스토랑의 커다란 냉동고에 시체를 숨긴다.

그리고 근처에서 영화 촬영을 하던 스텝들이 식당으로 찾아와 식사를 만들어 달라고 하자 자신의 요리솜씨를 발휘하여 이미 문 닫은 주인없는 식당을 임시로 열고 장사를 시작한다.

그때 라문다의 여동생 쏠레에게는 죽은 그녀들의 어머니가 나타난다. 저승에 가기 전 할 일이 있어서 나타났다는 어머니는, 라문다 몰래 라문다의 딸과도 만난다. 도대체 이런 일이 현실에서 가능한 것일까? 알모도바르의 ‘귀향’은 넉넉한 웃음과 깊은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장르를 넘나들면서도 작품성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알모도바르의 탁월한 연출력 때문이다. 코미디와 스릴러, 드라마를 넘나들면서 삶에서 진정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들을 전달하는 미덕을 갖고 있다.
 
영화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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