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지닌 두 남녀의 애뜻한 사랑이야기
 
언제 사형이 집행될지 모르는 사형수의 사랑 이야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소재 자체가 갖는 멜로성에 푹 빠지지만, 익사할 정도로 허우적대지는 않고 차분하게 두 사람의 감정선을 따라 가며 그들의 그늘진 상처를 보여준다. 관객들이 공감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은 객관적 관찰자의 시점에서 각각 깊은 상처를 지닌 두 남녀의 삶을 탄력적 거리를 두고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거리두기는 부분적 성공에 그친다. 결말에서는 흥행 코드를 따라가며 신파적 감성을 노출시키는 것이 감독의 죄만은 아니고 영화산업의 구조적 문제라고 해도, 감독은 자신의 미학적 저울추를 놓쳐버린 것이다.

배우들로서는 일생일대 만나기 어려운 배역에 도전하며 각각 최상치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의 흐름을 쥐고 있는 것은 사형수 윤수(강동원 분)가 아니라, 매주 목요일마다 그를 면회가는 가수 출신의 대학 교수 유정(이나영 분)이다. 윤수는 감옥에 갇혀 있고, 유정은 어머니의 집과 강의 하는 대학과 자신의 집, 그리고 목요일마다 면회가는 교도소 등 자유롭게 동선을 끌고 갈 수 있지만, 윤수는 과거를 회상하는 신이 아니면 감옥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적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의 주제를 확대하려고 했다면, 한 공간에 붙잡혀 있는 윤수가 오히려 정신적으로 내러티브를 끌고 갈 수 있게 만들었어야 했다. 윤수의 고통이 절절하게 관객들에 삼투될 수 있도록 흐름의 주도권을 바꾸는 것이, 이 영화의 소재적 상투성을 극복하고 미학적 깊이에 다가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감옥에 수감된 사형수와 처음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그를 면회 가는 교수가 점점 가까워진다는 설정은 무척 상투적이고 통속적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러한 상투성과 결별하려는 의지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너무 드러내 놓고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통속적 소재를 비범하게 다루려는 감독의 노력은 매우 약하다.

인간이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은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 볼 때다. 15살 중학생 때 사촌오빠에게 성폭행 당한, 그리고 성폭행 그 자체보다 거기에서 비롯된 어머니와 갈등이 자신의 삶에 깊은 골을 만들어 버린 유정의 상처와, 부모로부터 버림 받고 고아원에서 뛰쳐 나와 어린 동생과 함께 살아 가던 윤수의 상처는, 서로가 가진 외로움의 깊이를 이해하면서 치유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죽으려고 자꾸 자살을 시도하는 유정과, 사는 게 고통스럽다며 제발 빨리 죽여달라는 윤수의 상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감독은 그것이 왜 다른지, 질문하지 않는다. 사형제도의 문제점이라든가, 계층간의 갈등 같은 문제는 멜로 드라마의 깊은 상투성에 파묻혀 버린다.

구조적으로는 소피아 수녀가 어느 순간 화면에서 증발해버리는 것도 균형이 안맞고, 3명을 살해한 흉악범 윤수에게 도덕적 면죄부를 주려고 시도하는 회상신도 너무 관객지향적이다. 관객들에게 윤수를 이해시키고 좋은 사람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영화의 흥행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결코 올바른 방법은 아니다.
 
영화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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