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보기 아까운 음악가의 일대기
대중 예술가의 고뇌 짜임새 있게 표현.. 핵포드 감독 최고의 수작
 
레이 찰스. 블루스나 소울 음악을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검은 안경을 끼고 피아노 앞에서 어깨를 좌우로 앞뒤로 흔들거리며 삶의 비통함과 환희를 노래하던 레이 찰스 로빈슨은 지난 2004년 6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1930년 9월생이니까 미국 나이로는 73세였다. 그의 일대기를 그린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레이’는 대중음악사에 지워지지 않을 그의 뛰어난 노래 40여 곡과 함께 2시간 30분동안 우리를 전율시킨다.

‘사관과 신사’ ‘백야’ ‘돌로레스 클레이븐’ ‘데블스 애더버킷’ 등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영화는 나쁘지는 않지만 항상 무엇인가 부족했다. 이야기는 많은데 그것을 짜임새 있게 펼쳐내지 못했고 비주얼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작가주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미장센은 없었다. 하지만 ‘레이’는 분명히 지금까지 그가 만든 어떤 영화보다도 뛰어나다.

‘백야’에서도 할렘의 탭댄서 그레고리 하인즈를 잡을 때는 이상할 정도로 카메라가 생동감 있었는데 역시 테일러 핵포드 감독은 시각보다는 청각이 훨씬 발달한 감독이었다.

‘레이’는 우선 생전의 레이 찰스가 직접 영화의 음악 작업에 참여함으로써 지난 수십 년 동안 대중음악사의 물줄기를 바꾼 명곡들이 완성도 있게 포함돼 있다. 레이 찰스 역을 맡은 제이미 폭스는 말투나 동작까지 생전의 레이 찰스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 연기를 했고 특히 레이의 내면적 고뇌와 방황을 세포 속으로 흡수해 마치 또 하나의 레이인 것처럼 완벽한 분신으로 재탄생했다. 피아노 특기생으로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입학한 경력의 제이미 폭스는 레이 역에는 최적의 캐스팅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2시간 30분 동안 의자에 앉아서 이 영화를 봐야 하는 것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영혼을 흔드는 레이의 노래를 들으며 몸을 흔들다가 그의 고통스러운 삶의 궤적들이 전개되면 화면에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레이’는 무엇보다 실존 인물의 일대기를 그리는 전기 형식의 영화가 흔히 빠지기 쉬운 우상화의 함정에서 벗어나 있다. 감추고 싶은 고통스러운 삶의 질곡까지 솔직하게 묘사돼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레이는 후천적 시력 장애자다. 조지아주 알바니에서 태어난 레이의 일생에서 가장 어두운 그림자는 그가 6살 때 자신의 눈앞에서 어린 동생이 익사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일이었다. 빨래를 하기 위해 마당에 놓은 커다란 물통에 동생이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던 이 때의 상처는 평생 동안 지속된다.

1년 뒤인 7살 때 녹내장으로 조금씩 앞이 보이지 않기 시작한 레이는 끝내 완전히 시력을 잃는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아레사(샤론 워렌)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자기 힘으로 일어나라는 강한 교육으로 어린 레이가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닦아 준다.

가스펠에 블루스를 접목시켜 소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고 재즈에서 백인들의 컨추리 음악까지 다양한 장르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간 레이의 음악세계 뿐만 아니라 시골 사람처럼 순수한 것 같으면서도 어떤 도시인보다 교활했고 다양한 면모를 지닌 그의 복잡한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구축돼 있다.

목사의 딸과 결혼했지만 자신의 코러스였던 마지와의 사이에서도 아이를 낳을 정도로 다양했던 레이의 여성 편력과 오랜 마약 중독까지 솔직하게 드러낸 ‘레이’에는 안락한 일상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독창적 음악세계를 만들어갔던 대중예술가의 고뇌가 짜임새 있게 드러나 있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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