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이드 필'의 무한질주
 
‘번아웃’은 레이싱 게임이 준수하는 교통 신호를 무시한다. 과속과 중앙선 위반, 점프, 차량 뒤집기 등 파괴에 집중돼 있다. 하지만 달리는 쾌감과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스피드는 이 게임에 열광하게 만든다.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드리프트하는 법을 가르쳐준다면 어떨까? 심지어 반대 차선으로 가거나 최대한 다른 차와 가깝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강요한다면? 그런 게 어디 있냐고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말라. 바로 ‘번아웃’이라는 레이싱 게임 속에선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니까.

인간의 삶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자동차이기 때문에 게임계에서 레이싱 게임은 무수히 존재한다. 이런 레이싱 게임은 크게 아케이드 레이싱과 시뮬레이션 레이싱으로 나눌 수 있다.

시뮬레이션 레이싱은 최대한 실제 자동차를 운전하는 듯한 느낌을 살린 것으로 ‘그란투리스모’ 시리즈 등이 속하며 아케이드 레이싱은 ‘릿지레이서’나 ‘니드 포 스피드’ 등 운전 자체를 단순화하는 대신 속도감과 스릴을 즐기는 장르다.

그러나 ‘번아웃’은 아케이드 레이싱 게임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는 작품이다.
 
# 오직 하나의 규칙은 ‘규칙을 어겨라!’
 
드라이버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았을 것이고 특히 서울처럼 교통 체증이 심한 도시에 살고 있다면 더욱 간절한 것이 뭘까. 솔직히 얘기해보자. ‘저 앞차를 다 날려버리면 시원할텐데’라는 생각을 안 해본 사람 있을까? ‘번아웃’은 이런 생각에서 시작된 게임이다.

앞에 차가 있으면 반대 차선으로 달린다. 드리프트와 점프를 밥 먹듯 하며 마주 오는 차량과 최대한 가깝게 스치면서 스릴을 즐긴다. 도로에서 절대로 하면 안 되는 행동을 할수록 게이지가 차 오르고, 게이지가 가득 차 올랐을 때 또 하나의 규칙을 어길 수 있다. 바로 ‘과속’. 덕분에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위험한 운전을 하게 된다. 입가에는 스릴과 환희의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이 작품의 백미인 크래쉬 모드는 파괴 발상의 극한을 보여준다. 교통 체증이 심한 거리에서 최고 속도로 달려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다중 충돌 사고를 일으키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된다. 차를 많이 부술수록 점수가 올라간다. 게임 속에서만 즐길 수 있지만 누구나 해보고 싶었던 일탈 행동을 통해 ‘번아웃’은 극도의 쾌감과 스릴, 그리고 기존의 레이싱 게임들이 줄 수 없었던 새로운 맛을 선사한다. 덕분에 유저들은 끝없이 사고를 낸다.
 
# 괴짜 알렉스 워드의 괴짜같은 게임
 
이 게임을 만든 장본인은 알렉스 워드다. 필자는 미국에서 이 사람을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원래 그는 ‘아웃런’, ‘데이토나’로 대표되는 세가 레이싱을 너무나 좋아하던 유저였다.

그래서 레이싱 게임을 만들었는데 대부분의 크리에이터가 그랬듯이 처음부터 잘 나갔던 것은 아니다. 약 5년전, 경찰차를 몰고 도시를 질주하는 게임을 만들었고 많은 미국 유통사 관계자들을 만나 계약하려 했으나 힘들었다고 했다. 오죽하면 같이 게임을 만들었던 동료들조차 “당신이 만들었지만 나 같으면 이 게임 안 사요”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다니.

 당시에는 ‘그란투리스모’ 등의 시뮬레이션 스타일의 레이싱이 빛나던 시대였고 알렉스 주위의 사람들도 한결같이 ‘No’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게임을 끝까지 밀고 나갔고 결국 ‘번아웃’이라는 훌륭한 게임을 만들어 냈다. 가장 최근작 ‘번아웃 3’는 세계 최고의 게임유통사 EA와 손잡고 세계 최고의 게임쇼 E3에서 가장 주목받는 레이싱 게임으로 당당히 올랐을 뿐 아니라 폭발적인 판매량까지 보이고 있다.

 그가 나에게 한 얘기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처음 게임을 들고 E3에 왔을 때 아무에게도 게임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가 너무 무서웠거든요. 하지만 스탭들에게 말했어요. 언젠가 우리가 만든 게임을 큰 스크린으로 보여줄수 있을거야! 라구요. 그리고 4년이 지났고 지금은 보시다시피 큰 스크린에 걸려있네요”라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자신의 뜻을 끝까지 밀고나간 의지의 승리가 아닐까.
 
# 아케이드 레이싱의 부활 선언
 
사실 ‘번아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과거 오락실에서 레이싱 게임은 큰 인기를 누렸다. ‘아웃런’이나 ‘데이토나’, ‘릿지레이서’ 등 그 인기가 대단했다. 가정용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이 처음 발매될 때에도 킬러 타이틀(하나의 게임 때문에 게임기를 구입하게 할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가진 작품)로서 ‘릿지레이서’를 이식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픽이 발달하고 가정용 게임기로 게임을 더 많이 즐기게 되면서 점점 아케이드 레이싱의 인기는 식어갔다. 그 자리에는 뛰어난 그래픽과 리얼한 조작성을 가진 시뮬레이션 레이싱이 바통을 이었고 제작되는 게임의 개수 자체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번아웃’은 이런 상황에서 발매된 작품이다.

이 게임은 기존의 아케이드 레이싱의 인기가 떨어진 것은 장르 자체가 재미없었던 것이 아니라 게임들의 완성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는 무언의 대변자였다. 그리고 이 작품이 발매되면서 ‘니드 포 스피드: 언더그라운드’와 ‘미드나이트 클럽 2’, ‘미드타운 매드니스 3’ 등의 완성도도 급격히 올라 갔으며 동시에 예전의 인기를 되찾았다. 장르의 부활을 이끈 작품인 것이다.

시장에서 흥행성을 잃었다고 판단되는 장르를 게임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며 ‘뭔가 새로운’ ‘게이머들을 끌만한 매력’, ‘놀라운 참신함’을 더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통해 오락실의 레이싱 게임이 부활하기를 기대한다. 극장에서 영화 관람하는 것과 안방에서 비디오를 시청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오락실의 ‘아케이드 필’을 간직한 유저들을 위해 레이싱 게임의 부활은 절실하다.
 
이광섭 월간 플레이스테이션 기자(dio@game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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