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음흉한 야심 꺾기 위해 전쟁 결심
대장장이 오회에게 불을 다루는 법 배워
 
치우가 수치심과 울분을 삭이며 가까스로 동쪽으로 돌아갔을 때, 그를 맞이한 구려(九黎) 땅 사람들이 본 치우의 얼굴은 이미 저 동해 바닷물보다도 더 푸른빛으로 굳어 있었다. 치솟는 화를 금하지 못해 그렇지 않아도 빳빳한 머리카락은 쭈뼛쭈뼛 온통 찌르듯 바짝 세워져 있었다.

그 날 일어난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듣고 나서, 72명이나 되는 치우의 아우들은 당장에라도 달려가 황제의 눈에 창을 꽂아 버리겠다고 펄펄 뛰었다. 이들이 누구이던가? 치우와 비록 아버지와 어머니는 같지 않았지만 서로의 목숨을 걸고 먼지나 이슬처럼 사라지는 날이 오는 순간까지 서로를 믿고 의지할 것을 맹세한 형제들이었다. 그런 염치가 없는 신은 당장에 몰아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동생들을 진정시키면서도 치우는 머릿 속으로 네 얼굴의 입술 끝을 올린 채 수레 위에서 자신과 함께 수레를 끌고 있던 바람 신이나 비의 신을 돌아보던 황제의 거만한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이 당한 모욕이야 혼자 삭이면 그만이었지만, 그 날 보여준 황제의 행동을 가만히 떠올리니 그렇게 간단히 묻어 버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좋은 말과 좋은 얼굴로 감추려고 해도 세상을 향한 황제의 음흉한 야심은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 황제에 맞서기 위해 염제 찾아 나서
 
치우는 이 일을 의논하려고 서쪽의 큰 신 소호씨(少昊氏)를 찾아갔다. 그러나 인간을 비롯한 만물에는 자애롭지만 가깝다고 해서 무조건 편을 들어주는 일이 없는 엄격한 소호씨가 성급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말렸다. 무조건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정녕 소호씨는 내가 오로지 그 날 당한 모욕 때문에만 이런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날 황제가 한 말과 행동에서 세상을 지배하려는 욕심이 보이지 않던가요? 그는 여러 신들의 맹약을 등에 업고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온통 찢고 나눌 겁니다. 안정과 평화라는 명목하에 도무지 생기라고는 없는 세상을 만들어 버릴 거란 말입니다.” 그러나 소호씨의 답은 그저 자연의 섭리에 따르도록 모든 일을 순리로 푸는 것이 우리 신들의 미덕이라는 말뿐이었다.

“염제에게 부탁해 보십시다.” 낙담한 그에게 형제들이 권했다. 그렇게 해서 치우는 오래지 않아 다시 남쪽으로 염제를 찾아갔다. 가는 길에 치우 일행은 거인들의 나라인 과보국(?父國)과 용맹한 전사들의 나라인 삼묘국(三苗國)에 잠시 들렀다. 그들은 치우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염제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하니 잘하는 것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염제를 다시 판천으로 모셔오도록 힘써 달라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의 후한 대접을 뒤로 하고 떠나 마침내 염제가 머무르는 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염제는 그곳에 없었다. 시종은 염제가 세상의 모든 일을 단념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폐관(閉關)하여 깊은 명상에 들었다고 전하였다. 앞으로 염제는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치우는 너무 실망하여 기운이 쭉 빠지고 말았다. 이제 저 황제가 제멋대로 하는 것을 막을 신은 아무도 없단 말인가? 치우를 비롯한 형제들이 모두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을 때 문득 환하고 따뜻한 기운이 넘치며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발 아래 꿈틀대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이 보이고, 축융(祝融)이 그것을 타고 서 있었다. 염제의 밑에서 불을 다스리는 화정(火正)의 직책을 맡고 있던 그는 염제가 판천에서 쫓겨났을 때 함께 책임을 지고 물러났었다.
 
# 물에는 불로 맞서라
 
치우는 반가운 마음에 데일 듯이 뜨거운 그 붉은 몸을 얼싸안았다. 이 불의 신과의 반가운 해후는 아마도 치우에게 새로운 희망의 기운을 불어넣어 준 듯 했다. 그간의 지루한 일은 생략하고 결론부터 말한다면, 치우는 그 자리에서 염제를 설득하여 황제에게 대항하려던 일을 접고 스스로 앞장 설 것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굳이 처음부터 전쟁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망설이는 그가 결심을 하기까지에는 축융과 형제들의 격려, 그리고 이곳 저곳에서 소식을 듣고 찾아 온 여러 신들의 응원이 한 몫을 했다. 그러나 막상 황제를 치고자 결심하고 나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가장 신망 받던 염제조차 단숨에 물리친 황제가 아니던가? “우선 불을 다루는 기술을 익히소서” 축융이 조언했다.

“듣자하니 황제에게는 항상 따라다니는 응룡(應龍)이라는 신룡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는 물을 다루는 신력이 뛰어나다고 합디다. 황제와 다투게 된다면 분명 그는 물의 힘을 쓸 것입니다. 거기에 대비하려면 이쪽에서는 불의 힘을 다룰 줄 알아야겠지요. 저는 폐관중이신 염제 어른의 곁을 떠날 수 없지만 마침 제 아우 오회(吳回)는 저를 능가할 만큼 능력이 출중하고 또 뛰어난 대장장이이기도 하니 그 애에게서 배우시면 될 겁니다.”

이렇게 해서 치우는 원하던 대로 다시 염제를 부르지는 못했지만 든든한 동료가 되어줄 오회를 데리고 다시 북동쪽으로 올라왔다. 올라오는 길에는 오회의 충고를 듣고 여기 저기 철과 구리가 많이 나는 산에 들러 그것들을 잔뜩 캐어 가지고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침내 동쪽으로 송산(宋山)을 지나 다시 구려 땅으로 돌아 왔을 때, 치우의 일행은 그 수가 전보다 더 훨씬 늘어나 있었다. 치우의 소문을 듣고 여기저기에서 황제의 일에 은근히 반대하던 무리들이 그를 따라 온 것이었다.
 
정재서(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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