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게임 10년사
온라인게임 10년사
  • 장지영 기자
  • 승인 2004.03.19 0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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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땅서 리니지까지
 
# 온라인 게임의 효시 단군의땅, 쥬라기 공원

상용화된 국산 온라인 게임의 효시는 마리텔레콤의 ‘단군의땅’과 삼정데이타시스템의 ‘쥬라기공원’을 들 수 있다. ‘단군의땅’은 93년 9월 나우콤을 통해, ‘쥬라기공원’은 94년초 천리안을 통해 첫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이 게임의 핵심 개발자는 카이스트 출신의 김지호(단군의 땅), 송재경(쥬라기공원)이다. 이 시기 온라인 게임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업체는 단연 마리텔레콤이다. 마리텔레콤의 설립자 장인경씨는 김지호씨 등 카이스트의 젊은 개발자들과 온라인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이들을 규합해 회사를 설립했다. 그들이 처음 내놓은 ‘단군의 땅’은 PC 통신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 뿐만 아니라 해외에 수출돼 미국 NASA의 첨단 개발자들까지 게임을 즐겼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장인경 사장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94년은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통신친구로 만난 과학기술원 학부생들이 지나치게 머드게임에 몰입한 나머지 학사문제를 일으켜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뛰어다니다가 결국 창업까지 결행했습니다. 당시 모뎀사용자 백만명 중 40만명이 단군의땅을 즐겼을 정도로 인기도 폭발적이었죠. 하지만 수익구조가 열악해 직원들 월급조차 줄 수 없어 시장과 자본, 기술이 모여 있는 미국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단 아픈 기억도 있습니다."


# 게임에 그래픽을 입히자-‘바람의 나라’에서 ‘리니지’로

머드게임 일색의 온라인 게임 시장에서 세계 최초로 그래픽을 입힌 머그게임 ‘바람의 나라’가 등장한 것은 10년 남짓한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꼽을 수 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와 카이스트를 함께 다닌 김정주씨와 송재경씨 등이 연합해 만든 넥슨은 95년 12월 천리안을 통해 ‘바람의 나라’ 시범 서비스를 시작, 96년 4월 유료화를 단행했다. 세계 최초로 ‘머드+그래픽’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는 것만으로 일대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다. 비슷한 시기 카이스트 출신의 조현태 사장이 이끄는 태울도 머그게임 ‘파운데이션’을 개발, 유니텔을 통해 6월부터 서비스를 개시했다.

세계 최초로 그래픽을 입힌 온라인 게임을 개발했다는 것은 상징적 위상 만큼이나 어려움도 많았다. 넥슨의 설립자 김정주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고 미친짓 한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게임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하다 보니 좋은 개발자를 구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죠. 매번 학생 알바들로 임시 땜빵을 하면서 상당기간을 버텨야 했어요. 벤치마킹 대상이 없다보니 기술적인 문제에 봉착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한다는 표현에 가까웠죠. 무엇보다 네트워크를 전공한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머그게임의 성공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개발 뿐만 아니라 시장 분위기도 머그게임을 쉽게 반기지 않았다. 비싼요금 때문에 유저층은 마니아에 국한됐고 클라이언트 크기가 1.4MB나 되는 게임이 성공할 수 없다는 분위기도 팽배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눈부신 통신 기술의 발전은 2년후 머그게임의 성공시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 ‘리니지’ 신화

97년 말 ‘리니지’의 탄생은 한국 온라인게임사의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바람의 나라’가 그래픽 위주의 온라인게임시대를 열었다면 ‘리니지’에 이르러 비로소 실시간 전투를 기본 테마로 한 오늘날 온라인 롤플레잉게임(RPG)의 뼈대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바람의 나라’ 개발 주역 송재경씨가 엔씨소프트에 합류해 개발한 ‘리니지’는 그동안 턴방식으로 진행되던 전투 모드를 실시간 액션 방식으로 바꿔놓는 ‘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리니지’는 혈전(혈맹들의 전투), 공성전 등 온라인 RPG에서만 구현할 수 있는 독특한 세계관을 구축하며 온라인 RPG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해 나갔다.

‘리니지’가 처음 등장할 즈음 미국에서는 리차드 게리엇(현재 엔씨오스틴 근무) 형제가 만든 ‘울티마온라인’이 상용화돼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리니지’는 게임 자체의 혁명성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인프라와 온라인게임에 대한 게이머들의 낮은 인식으로 한동안 시대를 앞서 간 게임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다.

SI사업을 잠시 접어두고 ‘리니지’ 개발에만 몰두했던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의 증언은 5년이나 지났지만 그 때의 심경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엿볼 수 있다. "한글과컴퓨터 시절 옛 동료들을 가끔 만나면 무슨 게임으로 돈을 벌겠다고 난리냐며 비웃음 아닌 비웃음을 보내곤 했죠. 늘어나지 않는 동시접속자수를 지켜보고 있느라면 이제 접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하루가 멀다하고 불끈 불끈 치솟았습니다."

실제 98년 9월 상용화에 돌입한 ‘리니지’는 동시접속자(동접) 1000명 고지를 넘는데 무려 4개월이라는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하지만 ‘리니지’는 그 해 12월 문화관광부와 전자신문이 주최한 ‘대한민국 게임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폭발적인 상승세를 탔다.

다시 김택진 사장의 증언으로 돌아가보자. "대한민국 게임대상을 수상하면서 ‘리니지’가 본격적으로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4개월이 걸리던 동접 1000명 증가 추이도 한 달로 앞당겨졌습니다. 10개월후 동접이 1만명을 돌파하면서 상황은 더욱 급박해졌죠. ‘동접 1만명’은 숫자가 주는 상징성을 떠나 규모의 마케팅에서도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했습니다. 결국 동접 1만명은 1년 2개월만에 10만명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불어 났으니까요."

‘리니지’의 성공은 엔씨소프트라는 한 기업의 성공담으로 끝나지 않았다. 게임이 미래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사람과 돈이 게임업계로 몰리기 시작했다. 엔씨소프트가 ‘코스닥 황제주’로 급부상한 것도 바로 이 때부터다.
 
장지영 기자(jyaj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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