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만 한다고 꾸중을 들은 조카가 고모를 살해한 사건(연합뉴스. 2014.12.17)이 얼마 전 보도되었다. 죽은 고모나 죽인 조카 모두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13세 소년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50대 고모 손에 키워지고 있었다. 언론은 이 아이가 만10세 이상, 만14세 미만인 촉법소년(觸法少年:형사미성년자)이라 처벌이 불가능함을 언급하고 있다.

사실 이런 사건이 터지면 얼마 전까지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나고, 정부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난리법석이고, 게임사업자들은 기능성 게임을 등장시켜 게임은 좋은 것이라고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어떤 일인지 모두가 침묵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는 이 사건을 가족의 문제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족끼리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새해 첫날 아침 나는 시누이로부터 떡국 대접을 받았다. 시인인 시누이는 가족끼리 모이면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시에 대해 무지한 나는 시누이의 이야기를 늘 무시해버리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떡국을 얻어먹는 자리인지라 하는 수 없이 나는 시 얘기를 들어주려고 말을 꺼냈다. 시누이는 나에게 ‘해바라기’라는 시를 읽어보라고 내어주면서 이 시는 올해 시문학문인회로부터 올해의 시로 선정된 시라고 조용한 목소리로 알린다.

시누이로부터 상을 받은 시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시를 감상하려는 태도보다 뭔가 지적을 해야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아무리 시를 몰라도 분명 지적할 거리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자만심에 뭉쳐 있는 나는 지적할 거리를 찾으려고 시를 꼼꼼히 읽었다. 잘 써진 시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인정하기 싫어하는 내 모습을 숨긴 채 나는 퉁명스럽게 읽어 내려갔다.

시누이는 내가 다 읽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더니 이해한 대로 얘기를 해 보란다. 그토록 시가 싫다고 외쳐온 나는 뭔가 잘 아는 사람처럼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내 모습을 살펴보니 나의 행동은 시의 감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지적 우수성을 내보이고 싶은 행동이었다. 이해심 많은 시누이는 나의 잘난 척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 들어준다. 그리곤 나의 이해를 공감해주면서 이런 시를 ‘하이퍼’시라고 언급한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방식의 시라는 것이다.

하이퍼라니! 나는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것은 시가 아니라는 또 다른 지적질을 시작한다. 시누이는 나의 고집스런 지적질에도 그렇다고만 할 뿐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시를 공감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해석을 덧붙인다. 지적과 비난에 열을 내고 있는 나를 보면서도 시누이는 조근조근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나의 무지를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감싸주는 그러면서도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이것이 대화임을 비로소 알았다.

고모를 죽인 조카 사건에 대한 해답을 나로부터 찾을 수 있었다. 게임을 모르는 고모가 게임에 빠진 조카에게 일방적인 지적이나 비난이 아닌 대화를 했었더라면 조카가 적어도 고모를 살해하지는 않았을 텐데라는 슬픔이 솟는다.

세상을 더 많이 경험한 가족은 세상을 다르게 살아가는 가족을 향해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게임과 모바일  게임을 나쁘다고 지적하고 비난하려면, 또 게임사업자들의 기업 윤리를 요구하려면, 게임과 게임산업에 대해 이해해야 하고 가족끼리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상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요즘 `가족끼리 왜이래’라는 드라마가 인기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불효소송을 제기하는 내용인데, 이 역시 가족 간의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이경화 학부모정보감시단 대표 katiece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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