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시절, 산업 현장에서 절실히 느낀 것은 산업의 구심점이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차이점이 확연하다는 점이었다. 구심점이 있는 곳은 추진력부터 달랐고, 그렇지 않는 곳은 마치 패잔병들을 모아 놓은 듯 지리멸렬했다.

산업의 쌀이라고 일컬어지는 반도체를 세계적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고, 그 산업을 제조업종 가운데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로 올라서게 한 데는 그 업종을 대표하는 반도체 산업협회의 역할이 컸다.

이 단체는 지난 1991년 출범한 이후 당시 반도체 3사로 대표되는 기업들이 돌아가며 회장사를 맡았다. 그 때문인지 각론에서는 잡음이 없지 않았지만, 총론에서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오죽하면 경쟁사인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조차 뒤늦게 출범한 이 단체의 활동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하니. 협회의 경쟁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회장사의 강력한 리더십과 일사분란한 회원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국내 반도체산업은 미국과 일본 기업들의 경쟁 속에 흩날리는 주변 산업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우리의 주력인 D램 분야는 부침이 상대적으로 심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미국과 일본 등 경쟁국 업체를 따돌렸다. 산학연이란 우산아래 똘똘 뭉쳐 경쟁국과 맞선 것도 그 것이지만 산업을 지휘하고 조율하는 컨트롤 타워가 당당히 나서 최전선을 지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지배적인 평이다.

반면 사공이 많은 곳에선 배를 산으로 몰았다. 유성처럼 사라진 업종의 단체들이 대부분 그랬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런 곳에는 함량 미달인 인사들이 많이 들끓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리만 차지하려는 사람과 이름만 걸어 놓으려는 사람, 또 할 일없으니까 그 자리만이라도 차지하고 앉으려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가운데 빠지지 않는 직업군이 다름 아닌 군인과 정치인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인과 군인의 공통점은 대중의 눈을 상당히 의식한다는 점이다. 또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대중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공간의 활용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인데, 그런 경우 한곳에 집중해 프레임을 만들고 이를 완성하기 위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업종 단체에서도 얼굴용 또는 대외용 단체장 외는 굳이 군인이나 정치인을 단체장으로 영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자칫 협 단체가 내홍을 겪거나 부실해질 것을 우려한 때문이다.

게임산업협회가 남경필 전의원(현 경기도지사)을 영입한 것은 회원사 대표들이 서로 회장직을 맡지 않겠다고 등을 돌리면서 나온 고육책이었다.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실무용과 대외용을 구분하지 않고 그냥 자리 채우기 급급해 꺼내 든 카드였던 것이다. 그 결과 게임계에는 컨트롤 타워가 사라져 버렸다.

기꺼이 협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며 오신 분에 대한 도리와 예의가 아닌 걸 알면서 남 회장 체제에 대한 공과를 언급하는 것은 너무나도 긴요한 시기에 그의 능력과 역량에 관계없이 전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산업이 요동치고 지각 변동을 예고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협회는 지난 2년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새로운 로드맵 그리기를 위한 고민도 없었고, 시민단체 등 대 사회와의 대화를 위한 채널도 구축하지 못했다. 미래 먹거리를 위한 과제 수행 등은 협회의 연구 과제가 되지 못한지 꽤 오래 됐다. 또 어려운 시기라고 하면서 산업계 맏형들과의 변변한 대화의 장조차 마련한 적이 없다. 필자는 과거 협회장과는 적어도 분기 때 마다 만나 업계 현안을 나누었다. 하지만 남 회장 체제 아래서는 지난 2년간 한 번도 그를 만나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같은 책임을 결코 남 회장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남 회장이 게임계를 너무나 몰랐고, 지금까지도 그 내력을 제대로 모를 것이라는 그에 대한 동정론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일부 스포츠연맹 단체장처럼 그냥 자신의 이름만 걸어 놓으면 잘 될 것이란 믿음에서 회장직을 수락했던 게 아닌가 싶다.

결국 남 회장 체제는 게임계에는 잃어버린 2년이 되고 말았다. 산업계가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이른바 벤처게임 기업들이 나자빠지는 데도 협회는 그저 자신의 이름만 바꾸는 등 변죽만 울리기에 급급했다.

그렇지만 모두 다 잃은 게 아니라 얻은 것도 있다. 그 것은 두 번 다시 정치인을 협회장으로 앉혀선 안되겠다는 값진 교훈이다.

이 난국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산업의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그리운 것은 대한민국 게임 산업이 그만큼 절박한 위기 상황에 빠져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닌지. 정말 지난 2년의 값진 시간을 너무 허송세월하며 보냈다.

[더게임스 인 뉴스1에디터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inmo@thega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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