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게임중독법’ 입법화에 대응, 게임계가 강력한 저지 서명운동을 벌이자 일부 기독교 단체에서 이에 반발, ‘게임중독법’의 조기 입법화 실현을 촉구하는 서명 작업을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이젠 국회와 문화계 뿐 아니라 종교 단체까지 게임판에 끼어드는 형국이 돼 버렸다.

시국에 관해서는 그렇게도 입을 무겁게 다물고 있던 교계가 뛰어난 순발력을 보이며 ‘게임중독법’ 제정에 힘을 보태겠다고 나선데 대해 다소 생뚱함과 함께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휩싸인 게 단지 게임계 뿐일까 하는 의문을 가진 게 단지 필자만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의진 의원이 준비 중인 ‘게임 중독법’은 절대 아니며, 그대로 둬선 정말 안되겠다는 것이다. 그 것은 알코올과 마약 도박 등 반사회적인 매개물과 게임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이 그 첫번째 이유이고, 그런 이유로 제단하려 든다면 대중문화의 뿌리는 결단코 뻗어나지 못할 것이란 점이 그 두 번째 이유다.

‘게임중독법’ 입법화를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면서 느낀 또 한 가지의 소회는 어떤 식으로든 ‘게임 중독’이란 표현을 써선 안되겠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부문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아주 희미한데다 과연 적절한 용어인가에 대한 논의 과정 없이 일부 의학계에서 유사한 현상이다 하니까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문에 대한 정확한 단어의 정의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이번 논란도 이같은 두루뭉술한 뜻과 단어로 인해 게임이 싸잡힌 꼴이나 다름 아니다.

영사기가 발명되고 활동사진이 스크린을 통해 보여지자 당시 가톨릭 교황청은 칙령을 통해 교인들에게 활동사진을 보지 못하도록 막았다. 또 일부 교구에서는 영사기의 출현에 대해 마귀가 인간에게 안겨준 가장 극악한 선물이라고 혹평하며 영사기 출현에 대한 의미를 깎아 내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청은 그 칙령을 거둬들였다. 문명의 새로운 이기로써, 부정적인 현상은 있지만 이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영화시장은 그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영화가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는 대중적이기 보다는 전문가적 시각이 더 짙게 작용했다. 1920~1930년대 프랑스의 영화는 인상주의적 기법으로 영화 예술의 꽃을 피웠고 이후 프랑스 영화는 곧 예술영화의 대명사가 됐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프랑스 영화의 70~80%는 포르노 또는 작품의 질이 경쟁국 작품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는 평을 듣는다. 일부 작품은 프랑스 영화라 할 수 없다는 혹평까지 듣기도 한다. 그럼에도 프랑스 영화하면 예술성이 있는 작품이라고 불리는 것은 10%~20%의 빼어난 작품들이 이들 함량 미달의 작품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집단적 세몰이와 가치에 대한 편견은 시간과 세대를 초월한다. 특히 시공을 뛰어넘으며 분초를 다투는 디지털 정보사회에서의 문명 이기에 대한 논란은 한쪽 사회에서 보면 경계의 대상이자,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현상으로 읽혀지기 십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처지를 알리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의 공간이 더 넓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계의 처지가 다름 아닌 딱 이런 처지다. 싸우되 상대에 상처를 안기지 말고, 결코 논란의 중심에 서는 걸 두려워하지 말되 교만하거나 거드름 피우는 모습으로 비춰져선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세를 과시하기 위해 전개 중인 ‘게임 중독법’ 입법 저지를 위한 서명 운동은 이제 그 정도로 멈춰 세워야 한다. 감성은 감성을 낳고, 자극적인 것은 또 다른 충격 요법으로 다가오는 게 세상의 이치라는 점에서 그렇다.

할리우드 영화계 사람들 하면 미국 상류층을 연상한다. 사회적으로 보면 지도층 아닌 지도층이다. 사회의 시선과 대우도 남다르다. 존경심과 경외감으로 극진한 예우를 받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지금이 있기까지를 되돌아보면 눈물겹다. 1900년대 초반, 그들도 천박한 광대였을 뿐이다. 할리우드로 둥지를 튼 것도 오로지 값싼 토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주를 만들어 내다파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고, 돌을 캐는 인부들과 신분의 차이가 없었다. 오로지 영화를 만들어 돈을 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바뀐 것은 할리우드 영화계 사람들의 친 사회적 활동과 노력 때문이다. 냉대와 혹평 속에서도 사회로 다가가려는 나눔의 사랑을 조직적으로 실천했고 자선 파티는 그들의 기본 메뉴가 될 정도로 즐겨 열었다. 결국 그들에 대한 사회의 분위기가 온화하게 바뀐 것은 할리우드 영화계 사람들이 사회와 결코 대적하지 않고 더 열린 자세로 다가 갔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게임계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날선 칼끝을 방불케 할 만큼 싸늘하다. 그만큼 게임계가 사회와 불통이거나 다가가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특히 그렇다. 그렇다면 쥐고 있을 게 아니라 내려놔야 하고, 양보할 게 있다면 백번이고 자리를 내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사회정서에 반해 일굴 땅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낮은 곳으로 내려 와야 하고, 나눔의 실천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 것이 게임계가 바로서는 지름길이다. 그래야 게임에 대한 사회 계층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더게임스 모인 편집국장 inmo@thega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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