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재촉하는 4월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창경궁의 담벽은 유난히 짙은 회색 빛깔을 띄고 있었다. 담 넘어 핀 개나리, 진달래 꽃이 보이지 않았다면 그 모습이 을씨년스럽게 보일 게 분명했다.

 

무거운 느낌을 지우지 못한 채 만난 최 광식 문화장관은 의외로 반갑게 맞아 줬다. 그와의 두 번째 만남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최 장관의 성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때문에 기분은 다소 밝아지고 가벼워졌다.

 

최 장관은 달변에 가까웠다. 목소리도 컸고 말도 끊임이 없었다. 게임산업에 대한 애정도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만큼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경쟁력 있는 미디어가 앞서도 향후에도 없을 것이란 듯이 애찬론을 펼쳤다. 대화를 나누면서 게임산업으로 인해 빚어진 사회적 현상과 그 편린을 얘기할 즈음엔 6척이 넘는 그의 큰 덩치가 갑자기 작아져 버린 듯 했다.

 

한마디로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모든 문명의 이기는 역기능과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역할과 현상을 최소화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는 건 해당 산업계뿐 아니라 구성원이면 모두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를 과제가 아니라 숙명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모처에서 만난 정부의 한 관계자는 게임계를 이렇게 비유했다. 어깨를 펴고 다녀도 되는데, 그렇게 다닐 수 없는, 그런 운명을 스스로 불러들인 자들인 듯하다고 했다. 그런 구도를 깨고 나름,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와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데, 그런 곳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뒤집어 보면 겸손일 수 있고 겸양처럼 보이는데, 다른 한편으론 스스로의 운명을 갬블쪽으로 긋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더라는 게 이 관계자의 견해였다.

 

그렇게 보니까, 화려한 무대 뒤에 서 있는 스타들의 또다른 면모일 수 있겠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 보지만 그 조차 아니면 어떻게 하나 하는 조바심까지는 지울 수 가 없었다.

 

그 마저도 아니라면 산업인으로서도 아닌 게 뻔하고, 그렇다면 변방에서 머물다가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는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 실제인 양 판을 친 꼴인데, 정말 그 게 현실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거기까지 상상력이 미치자 순간 소름을 돋았다.

 

게임계가 신기루의 그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실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축성이다. 그 돌을 지금도 갈고 닦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다름아닌 1세대 게임인들이다.

 

강변 테크노마트 땀 냄새가 찌든 골방에서, 아니면 강남의 한 모퉁이 방에서, 혹은 처마가 코앞에 보이는 사무실에서 게임과 씨름하며 지내던 과거 그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들은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주눅이 들어 어깨를 떨구며 살지 않았고, 상대의 매서운 눈길을 의식해 고개를 숙이며 지내지 않았다고 했다. 오로지 게임 개발에 매달렸고, 좋은 작품을 완성해 보고자 몸부림쳤을 뿐이라고 했다. 그런 그들이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고 있다.

 

게임산업계의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시장규모가 10조원에 육박하면서 들녘엔 벼보다 쭉정이가 판을 치고 있고, 개발자보다는 장사꾼, 마케터들이 주무르는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옳고 그름이 오로지 흥행 여부에 달려있고, 흥행여부 또한 작품보다는 장사꾼, 마케터의 수완에 좌우되는 등 흔들린다면 게임을 과연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것은 게임이 아니라 갬블이다. 그리고 그 것은 산업에서 파양돼 가는 지름길이다.

 

사회의 부정적인 시각과 게임에 대한 빨간색 경계의 신호는 바로 이같은 위태위태한 게임산업계에 대한 일종의 메시지와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끄떡하지 않고 오로지 한쪽으로만 말머리를 대고 달리려 하고 있다. 그 결과는 눈을 감고 봐도 뻔하다.

 

게임 과몰입과 갬블의 경계선에서 퍼가기만 했지 돌려주지 않는 장삿치적 양태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 할리우드가의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와 위치를 쌓은 것은 외양 못지않은 내실을 기했기 때문이다. 그 내실이란 사회와 끊임없는 대화의 몸짓이었고, 나눔이었다.

 

게임계가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것은 진달래와 같은, 개나리꽃과 같은 존재들이 산하에 뿌려지고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정원을 받쳐주고 향기를 내 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계에 몰아닥칠 앞으로의 기상도는 그렇게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장대비가 쏟아질 게 분명하고 장맛비처럼 이틀이 멀다할 만큼 게임계를 적시고 울릴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담 높은 몇몇 집을 빼곤 키 작은 집들 뿐 인데. 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회색빛으로 도배된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순 없다.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신기루가 아니라 담넘어 휘황찬란한 게임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두껍고 무거운 장막을 거둬내야 한다.

 

그 것은 게임이 아닌 것을 마치 게임인 것처럼 포장해 끝내 말머리를 돌리려 하지 않는 이들을 솎아 내는 일이다. 이들이 개과천선 하지않고 오직 자신의 목적만 달성하려 든다면 뽑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로 인해 더 이상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떨구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니던가. 이젠 가슴을 활짝 펴고 창경궁 길을 따라 창덕궁 돌담길도 걷고 싶다. 잔인한 4월의 봄을 맘껏 맞고 싶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게임아닌 게임으로 산하를 더럽히는 자들은 드러내야 한다. 껍데기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더게임스 모인 편집국장 /건국대 겸임교수 inmo@thega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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