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발명가 토마스 앨바 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라는 기계를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인 것은 1891년 봄의 일이다. 이 기계는 작은 렌즈를 통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스크린을 이용한 영사기의 전 단계의 모습이었다. 사람의 눈은 1초에 10개 이상의 형상을 보게 되면 연속적인 동작으로 읽게 된다. 이 것이 이른바 잔상효과 라고 불리는 데 이를 응용한 것이 바로 영사기다.


작은 공간(렌즈)에서 큰 공간(스크린)으로 끄집어 낸 사람은 유기화학을 전공한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였다. 이들은 움직이는 사진을 촬영하고 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시네마토그라프를 완성해 선보였다. 오늘날의 영사기와 영화 촬영기의 시초다. 이듬해 이들은 파리의 한 지하 살롱에서 자신들이 완성한 10여편의 활동사진을 동시 발표, 거센 반향을 일으킨다. 1895년 12월,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최초로 스크린을 통한 영화가 세상에 선보인 것이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곧 주변 국가인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로 보급이 확산됐고 아시아 지역인 인도로 까지 영화 보급이 이뤄진다. 19세기말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무려 750여편의 영화카타로그가 만들어졌다. 놀라울 일이다.  


대중 문화 확산의 일대 전기를 예고하는 영화가 탄생했지만 걸림돌은 수없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건이 로마 교황청의 영화 관람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칙령 발표였다. 20세기 들어 활동 사진과 소리가 합쳐진 본격적인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하자 교황청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영화 관람을 제한하는 칙령을 내린다. 교황청은 이 칙령을 통해 영화는 악령이 인류에 가져다 준 선물이라며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못마땅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거대한 문화기류 앞에 교황청도 얼마가지 않아 손을 들고 만다.


한때 위해 논란을 불러온 복싱은 이종격투기 바람이 일기 전까지만 해도 인기종목 중 하나였다. 미국의 복싱 스타 캐시어스 클레이(후에 무하마드 알리로 이름을 바꿈)와 소니 리스턴과의 세기적 대결은 세계 헤비급 프로 복싱의 인기를 단숨에 톱으로 랭크시키는 바람을 일으켰다.  TV 프로그램에서 광고를 쉽게 잡을 수 없는 몇 안되는 종목 가운데 하나가 됐고 젊은 청소년들에겐 꿈과 미래의 산실처럼 여겨질 만큼 스포트 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20세기 초반 때까지만 해도 복싱은 뒷골목 선술집의 주먹 문화였다. 마치 마약과 금지된 주류 거래와 유사할 만큼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흔한 말로 암흑가의 언더 스포츠였던 셈이다. 복싱에 대한 인식이 나아진 것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였다. 하지만 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복싱에 대한 비호감을 나타냈다. 그래서 나온 게 대회가 열릴 때마다 높은 세율을 매겨 복싱이 제도권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 그렇지만 지식인층이 기반이 된 미국 사회는 이를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임이 시대의 아이콘이자 제도권의 화두가 되고있는 모양이다. 이쪽 저쪽에서 게임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하는 걸 보면 그런 것 같다. 관심을 가져달라며 아무리 외쳐도 쳐다보지도 않던 곳에서 조차 시시비비를  논하고 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이쯤에 이르렀다고 하면 게임계도 피하지 말고 정면 돌파할 각오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게임이 청소년들에게 마약을 주는 것도 아니고 도박을 가르치는 것도 아닌데 끄떡하면 게임을 사회악처럼 깎아 내리고 있다.그러나 여기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하겠다.


최근에는 아예 게임계에 대해 돈을 내 놓으라고 윽박 지르고 있다. 또 말을 안들으니까 이젠 법으로 하겠다며 협박이다. 그들의 논리대로 하면 게임계는 정말 파렴치하고 뻔뻔스런 집단이다. 제대로 세금도 안내고 무임 승차하는 기업이다. 오로지 관심은 청소년들의 주머니를 후리는 것이고 그들의 가출을 부추기는 불량 집단이다.


그런데 여기서 울화가 치밀고 한심스러운 것은 정부의 쌍나팔 소리다. 한쪽에선 잘 한다고 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무대에서 내려 가 달란다. 과학적인 근거도, 뚜렷한 배경도 없다. 그냥 청소년들이 좋아하니까 문제라는 것이다. 정말 웃기는 소리다. 정부 내에서 조차 그렇게 조율이 안되고 손발이 안 맞는가.


게임계가 일부 시민 단체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불리고 그렇게 바라본다면 죽을 심사로 싸울 수 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성숙된 시민단체가 아직도 적지 않고 열린 지식인층이 바라보는 게임계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은 콘텐츠 시대에 살면서 핵심 코어를 빼 버리고 살자며 달려드는 꼴이라며 일부 시민단체의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꼬집고 있다. 일각에서는 또 경쟁국에서는 한국 정부와 일부 시민단체의 움직임에 아주 쾌재를 부르고 있는 실정이라며 게임계의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청소년들에게 꿈과 이상의 문화를 파는 게임계에 대해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지 못할 망정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들이 이렇게 쏟아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번 만큼은 돌아가지 말고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 그래야 칙령을 거둬 들이든지 아니면 현실로 받아 들일 게 아니겠는가.

       
[더게임스 모인 편집국장 inmo@thega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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