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란 무엇인가
 
 박정환
 
 90년대 후반 한국 사회에 등장한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라는 걸출한 두 게임의 등장은 그동안 학습에 방해되는 아이들 놀이 수준에 그친 게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로 게임은 놀이문화의 중심이자,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21세기 문화산업의 중심으로,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예술형식이자 교육수단으로 그 가치를 높여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게임의 긍정적인 가치 이면에 게임의 폭력성이나 중독성과 관련된(혹은 관련됐다고 여겨지는) 여러 사회적 문제들은 동전의 양면마냥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는 그림자로 치부하기엔 그 음영이 너무 짙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상반된 평가들이 게임에 대한 막연한 기대, 오락거리나 돈벌이 수단이라는 제한적 인식, 게임에 대한 단편적/제한적 연구결과, 초등학생의 게임 이용시간 같은 몇몇 통계에 대한 확대 해석 등과 같은 게임의 현상적 측면에만 근거함으로써 게임 자체에 대한 이해와 게임의 다양한 활용가능성을 제한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같은 문제는 지난 바다이야기 사태나 아이템현금거래 논의, 세컨드라이프의 게임 여부 논의에서 보듯 기본적으로 사회적 차원에서 게임 개념에 대한 논의와 이해 부족에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게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현상적 수준에 그친 이유를 생각해 보면 먼저 게임 업계 측면에서 과연 게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는지가 주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즉 일부 업체들이 게임이 아닌 이익추구에만 집중한 채 성공한 소수의 게임을 따라 게임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 없이 그래픽 개선, 퀘스트와 아이템 추가, 이벤트 마련 등 게임의 표현적 측면 또는 마케팅 등 게임 외적 측면에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고 이는 게임 시스템을 파악한 국내 게임이용자들에게 매번 비슷비슷한 형식의 게임들만을 제공함으로써 반복적 플레이에 따른 지루함과 실망만을 주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아울러 게임의 이런 표현적/형식적 유사함도 문제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게임이 전달하는 내용이 단순하고 특정 영역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퀘스트나 스토리 혹은 장르의 다양성 차원이 아닌 게임을 통해 전달되는 가치나 이데올로기 차원의 문제이다. 즉 문제 해결을 위한 폭력의 정당화와 일반화, 선악의 이분법적 갈등 구조, 캐릭터의 정형화, 아이템이나 캐릭터 매매에 따른 물신적 가치 추구, 집단 이익을 위한 개인의 도구화 등 구시대적 가치들, 현실문제에 대한 외면, 인간에 대한 왜곡된 인식 등 여러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재생산 되는 가운데 새롭게 개발되는 게임들 또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의 심화에 긍정적 작용을 하지 못함으로써 업계 스스로가 게임의 가치를 깎아 내린 것이다. 단순히 개발의 어려움이나 관행이라는 이유로 혹은 전문 인력 부족이나 수익성 제한 등의 이유로 그 노력이 소홀하지 않았는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한편 이런 게임 논의의 부실함은 학계에도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게임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저질 오락이나 돈벌이 수단 또는 저급예술로 치부하고 학문적 대상에서 제외시킨 것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이후 게임의 사회적 영향력이 증대됨에 따라 게임에 대한 연구가 증대되기는 했지만 이 경우 게임중독이나 폭력성 등 게임에 대한 부정적 현상에만 초점을 맞춘 내용들이 다수였다. 문제는 이와 관련 내용들이 게임 자체에 대한 선행 연구 없이 결과만을 다룬 다는 점에서 게임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와 부정적 인식을 낳는다는 점이다. 또한 연구 방법 면에서도 실험 대상자의 일관성 부족, 짧은 실험기간, 연구에 쓰인 범주나 개념들의 혼용과 편향된 정의, 연구에 사용된 게임들의  대표성 문제, 영화나 TV, 실험대상자의 가정환경 등 폭력성을 유발하는 다른 요인들과 게임 간 관계에 대한 미비한 분석 등 연구 설계에서부터 결과 해석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게임을 대상으로 하는 독자적인 학문이 없는 상황에서 개별 연구자들의 입장 혹은 기존 학문을 바탕으로 연구가 이뤄짐에 따라 게임 개념과 기능에 대한 단편적인 정의와 활용만이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연구결과에 대한 선별적인 수용이 필요하다. 특히 게임을 소설이나 영화 같은 기존 내러티브 매체(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은 해당 연구의 성과를 일부 인정하더라도 게임은 기본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게임의 본질을 설명하기에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 경향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게임을 부정적인 매체로 주장하는 의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는 비단 게임뿐만 아니라 청소년, 대중예술, 놀이에 대한 사회 특히 기성층의 무관심과 무지 그리고 막연한 불안감과 정치적 의식을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과거 영화나 라디오, TV 등 새로운 매체의 등장에 대한 사회 주류층의 우려와 그 흐름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성적이 중시되는 한국 사회에서 액션영화나 홍콩 느와르 영화에 빠져 그것을 따라하거나 스타에 열광한 채 공부를 소홀히 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시도하던 청소년들에 대한 불안과 유사해 보인다. 이와 같은  기성층의 인식은 청소년에 대한 교육과 양육을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타당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부르디외나 헵디지의 논의처럼 대중문화 또는 청년문화(하위문화)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기존의 정치적/문화적 입장에 기초한 배타적 인식과 구별짓기라는 점에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아울러 국내에도 이슈가 되고 있는 게임중독이나 폭력성 같은 문제들도 전술한 게임 연구의 한계에서 보듯 재고의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게임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와 이해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현재와 미래에 게임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게임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긍정적인 면에서든 부정적인 면에서든 게임에 대한 편향된 접근과 활용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결국 게임의 기능이나 효과가 아닌 본질에 대한 논의, 즉 게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게임 그리고 게임과 관련된 개인적/사회적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 게임에 내재한 여러 가능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여러 논의들이 혼재한다는 점에 어려움이 있다. 공유된 내용이 없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통합적 연구가 부족하거나 혹은 문화라는 개념처럼 그것이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내용들이 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여러 논의에 포함된 공통된 개념을 살펴보면 크게 놀이, 규칙, 상호작용, 승패(경쟁), 하드웨어(컴퓨터, 아케이드 등)와 같은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다.
 
   놀이의 경우 게임에 대한 여러 논의에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놀이에 대한 이해는 게임을 이해하는데 필수사항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놀이에 정치 경제, 문화 등 기존 사회영역과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중요성을 부과하며 놀이의 총체성(자기목적성)을 강조한 요한 호이징아(Johan Huizinga)와 그의 논의를 발전시켜 놀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한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의 내용은 그 자체로서뿐 아니라 게임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중 게임과 관련한 중요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놀이의 총체성(자기목적성)과 허구성 그리고 규칙(명확한 승패 결과)과 의지 여부에 따른 놀이와 게임의 구분과 놀이의 분류, 상호작용성을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놀이의 총체성과 허구성은 놀이가 현실과 구분되는 독자적 성격과 놀이 규칙의 강력함을 설명하는 것이다. 예로 소꿉놀이나 병원놀이를 생각해보면 성인들이 보기에 놀이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행동은 특별히 도움 되지도 않고 현실성도 없어 보이지만 아이들의 경우 최소한 놀이를 하는 시간만큼은 아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나 남편, 아내 혹은 의사로서 놀이터를 병원이나 가정집으로 그리고 플라스틱 장난감을 실제 식기류나 의료기구 삼아 밥을 먹고 진찰을 함으로써 자신들을 실제 부부나 의사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 경우 소꿉놀이의 규칙은 놀이 성립에 절대적인 것으로 놀이에 참여하는 아이들 중 일부가 놀이 규칙에 불만이나 의심을 갖고 그 규칙을 어기는 경우 놀이를 통해 형성된 세계는 깨지고 아이들은 의사나 부부로서의 자신들의 역할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함으로써 다시금 현실의 아이들 역할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놀이의 소재나 규칙이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거나 혹은 영향을 받는 다는 점에서 호이징아가 강조한 놀이의 독립성을 단순히 현실과 놀이 간의 단절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같은 놀이라도 규칙이나 의미들이 지역이나 시대 등에 따라 지속적으로 바뀌는 것처럼 놀이는 또한 현실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영역인 것이다. 마치 한 나라가 독립국이라고 해서 다른 나라와 교류가 단절되는 것은 아니며 지속적인 교류 속에 그 나라 자체의 규칙이 있고 이것을 사람들이 인정하고 또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결국 놀이의 독럽성이란 놀이가 노동이나 생활양식 등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나름의 규칙을 갖고 사람들이 놀이에 참여하는 동안만큼은 이를 받아들여 현실 규칙보다 놀이 규칙을 우선시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놀이의 독립성의 연장선에서 게임 특히 온라인게임을 통해 구현되는 가상공간을 생각해 보면 이 역시 해당 게임에서 제공하는 규칙을 통해 구성된 그 자체로 독립적인 공간으로 게이머들은 그 영역에 의식적으로 참여해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즉 게임 가상공간은 개방형 체계로서 자체적인 규칙을 갖고 작동하지만 개발사와 게이머들을 통한 외부 세계(현실)와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으로 끊임없이 변화는 것이다. 이때 게임 규칙과 현실 규칙이 구분되지 않거나 상황에 따라 두 규칙을 적절히 사용하지 못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덧붙이면 일부에서 게임을 마약으로 비유하며 내세우는 근거가 게임이 몰입을 전제로 한다는 것, 즉 게임규칙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데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몰입 자체가 아닐 것이다. 문제는 다양한 역할이나 상황을 안전하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게임 자체의 특성 외에 게임에 이야기를 도입하거나 사실적인 그래픽 등을 통해 게이머들로 하여금 몰입을 장려하는 가운데 정작 게이머들이 몰입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방안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단순히 몰입 자체를 문제 삼게 되면 운동이나 공부에서도 몰입을 경험할 수 있으므로 이들 역시 마약과 같은 것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게임에 대한 몰입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게임에 대한 몰입을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하는 것 그리고 게임에 대한 몰입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한편 카이와는 놀이를 분류하면서 규칙의 유무 혹은 복잡함 정도로 구분되는 파이디아(Paidia)와 루두스(Ludus)라는 개념을 강조하는데 파이디아는 즉흥과 희열의 원초적인 힘, 통제되지 않는 일시적인 기분으로 뚜렷한 목표와 목적이 수반되지 않는 육체적 혹은 정신적 활동으로 놀이라 할 수 있으며 루두스는 이유 없는 어려움을 추구하는 취향으로서 파이디아에 복잡한 규칙이 부여돼 승리와 패배, 이익과 손실을 규정하는 규칙들의 체계 하에 조직된 활동, 즉 일반적인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게임 디자이너 곤살로 프라스카(Gonzalo Frasca)는 카이와의 이 논의를 바탕으로 규칙유무가 아니라 게임에서 제시되는 뚜렷한 목표 유무에 따라 목표 없이 플레이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파이디아와 승패 혹은 성공과 실패라는 목표와 이를 위한 규칙을 갖는 루두스로 구분하게 된다. 심시티(Sim City)처럼 게임에 뚜렷한 목표가 제시되지 않고 게이머들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게임들이 파이디아 성격이 강한 것들이다. 반면 대부분의 게임들, 특히 스포츠나 대전격투 같은 게임들은 명확한 결말(목적)과 규칙을 가짐으로서 루두스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이디아적 게임과 루두스적 게임 구분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보통 게임 안에 두 성격이 내재한 상태에서 게이머의 플레이에 따라 특정 경향이 두르러지는 것이다. 즉 파이디아 경향이 강한 심시티 같은 게임도 게이머가 자체적으로 목적과 규칙을 정하고 플레이하면 곧 루두스 경향이 강한 게임이 되는 것이다.
 
   끝으로 놀이의 상호작용성이란 놀이는 사람들이 직접 참여해서 구체적인 행위를 하지 않으면 놀이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있다. 즉 남들이 하는 놀이를 보고 듣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놀이에 참여해서 보고 들음으로써 정보를 수집하고 이 정보를 토대로 구체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그에 따른 결과를 산출하는 것이다. 물론 놀이를 하지 않고 보는 것 역시도 상호작용이며 또한 그 나름의 중요성을 갖지만 이것의 한계는 보는 것만으로는 놀이가 이뤄지지도 그리고 과정과 결과에 (주요한)영향을 미칠 수도 없다는 점이다. 소설이나 영화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들은 관객 혹은 독자의 유무 그리고 내용이나 감독 의도에 대한 관객의 이해 정도와 상관없이 작자가 이미 완성한대로 진행되며 또한 관객은 영화 내용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점에서 상호작용 정도가 낮다. 물론 이후에 인터넷 등을 통해 여러 사람들과 영화에 대한 해석을 공유하거나 팬픽이나 코스프레 등을 통해 원작의 재창조가 가능하지만 이것들로 인해 원작 자체가 변화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상호작용 정도는 놀이에 비해 낮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놀이는 기본적인 규칙만 공유한 상태에서 시공간이나 참여자의 조건 등 여러 변수에 따라 지속적으로 그 내용과 결과가 변한다는 점에서 상호작용 정도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게임의 경우에도 놀이처럼 게이머의 참여와 조작, 정보습득과 그에 기반한 결정을 통해 게임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상호작용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게임 역시도 루두스적 성격이 강한 게임의 경우 상호작용정도가 제한된다고 할 수 있으나 이는 전술한 것처럼 루두스적 게임과 파이디아적 게임 간에 게이머의 플레이방식에 따라 상호전환이 가능하고 또한 아무리 루두스적 성격이 강한 게임도 이동 등의 조작이나 전투 같은 사건을 해결해야만 게임 진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영화 등 기존 매체에 비해 상호작용정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놀이와 게임의 높은 상호작용은 기존에 작자와 수용자간의 하향 소통 관계, 즉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라는 구도를 깨트리고 수용자의 참여와 자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한편 사람들이 이와 같은 놀이를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재미를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재미는 크게 성취 같은 동기적 속성과, 집중, 몰입, 학습 같은 인지적 속성 그리고 놀람, 기쁨, 편안함 같은 정서적 속성을 갖는데 게임을 하면서 얻는 재미의 경우 이러한 속성 중 특히 인지적 속성이 주요한 바탕이 된다. 이는 게임이 소설이나 영화와 달리 게이머들이 직접 게임을 진행시켜야 하기 때문으로 게임 진행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규칙이나 패턴을 파악하고 익히는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지적 속성의 재미는 정보처리자(게이머)의 대상(게임 규칙이나 패턴)에 대한 기대와 불일치 그리고 이 불일치의 인지적 해결을 통해서 나오는 것으로 정보처리자는 그들의 사전지식 등에 근거해 대상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되는데 이때 기대와 다른 상황이 일어나면 긴장, 또는 놀람으로 생리적 각성수준이 높아지게 된다. 이에 정보처리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습득, 추론하여 기대 수준을 재조정 하는 등 기대와 대상에 대한 정보나 반응을 일치시키면 높아진 각성수준은 다시금 적정 수준을 유지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정보처리자는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반면 정보처리자가 이 과정에 실패하거나 혹은 이 과정이 너무 쉽게 일어나면 불안감이나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인지적 재미는 사전지식이 중요하며 아울러 정보처리자가 기대-불일치 해결 과정에 부여하는 가치가 재미를 느끼는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게이머를 예로 들어보면 게이머는 다른 RTS게임 경험, 스타크래프트의 유닛 외형이나 동영상, 다른 게이머들의 이야기 등을 통해 게임의 진행이나 조작 방식, 난이도 등에 대해 다양한 기대를 하게 된다. 이후 게임을 직접 하면서 다른 게임과의 진행 방식 차이로 인한 혼란 등 여러 기대-불일치-해결 과정을 겪으면서 게임 진행을 하게 된다. 이때 불일치 해결 과정이 너무 어려워 불안해지거나 반대로 사전지식이 풍부해서 기대-불일치-해결 과정이 너무 쉬워 지겨워질 경우 게임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스트크래프트, 더 나아가 게임이 게이머에게 TV시청이나 운동, 연애 등 다른 활동을 하는 것과 비교해 중요할 때, 즉 가치가 있다고 여겨질 때 재미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놀이와 재미 개념은 또한 학습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다. 즉 놀이를 위해서는 놀이 규칙의 설정과 이해가 요구되며 재미, 특히 인지적 재미의 경우 추론과 규칙화 과정을 통해 기대 불일치를 해결하는 내용에서 보듯 기본적으로 놀이와 재미는 규칙, 시스템, 패턴 등에 대한 정보 습득, 추론, 구성, 응용 등 학습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이는 게임 역시 마찬가지로 게임 플레이의 기본 과정이 정신적/육체적으로 게임 규칙에 대한 이해와 적응, 조작 방식 등 게임 진행에 요구되는 기술의 숙달과 활용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단적으로 말하면 게임이란 곧 무언가를 익히고 활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바로 게임의 기본적인 재미라 할 수 있다. 물론 학습은 인간 활동 대부분에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게임의 학습요소를 영화나 TV, 책 등 기존 매체나 콘텐츠와 비교해 평가절하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게임의 학습요소에 두드러지는 특징은 학습한 규칙 혹은 기술을 바로 그 게임을 통해 안전하게 실행(연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게임과 컴퓨터 시뮬레이션 간의 관계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시뮬레이션이란 대상이나 현상들의 구성원리나 작동방식을 모델링 한 시스템을 통해 다양한 실험을 행하거나 작동방식을 실연하는 것으로 모델에 다양한 변수를 입력함으로써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즉 기존의 소설이나 영화가 비행기가 나는 모습처럼 사건이나 대상의 특정 단면만을 보여준다면 시뮬레이션은 비행기의 특성이나 바람의 세기, 조정 등 다양한 변수 입력을 통해 상황에 따라 실제 비행기가 어떻게 나는지 그 결과를 산출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체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직접 결과를 산출하는 시뮬레이션은 사용자의 능동적 참여와 과정과 결과에 대한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것은 정해진 내용을 전달하기만 하는 기존 매체에 바탕을 둔 학습방식, 예술 감상, 재미에 대한 편중에 문제를 제기하고 극복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정해진 객관적 사실만을 강조하는 학습방식, 감상자의 느낌, 생각보다 작자의 의도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중심이 되는 예술 감상, 영화 관람처럼 직접적인 참여가 제한된 채 보기만 하던 재미에서 벗어나 사용자가 중심이 되어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며 과정과 내용을 스스로 구성하고 결과에 대한 피드백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는 학창시절 과학실험이나 실습시간을 통해 얻게 되는 지식과 그 때의 재미를 생각한다면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모형 등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아날로그 시뮬레이션이 기술적인 문제나 비용, 안전문제 등으로 활용이 제한된 데 비해 컴퓨터를 사용한 디지털 시뮬레이션은 그 활용 영역이 크게 확대되어 관련 프로그램의 보급이나 사용자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활용능력만 뒷받침되면 실제적인 활용이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건 시뮬레이션이 기존 매체에 비해 높은 상호작용, 참여적, 탈중심적 성격이 강하다고 해도 그것이 무한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시뮬레이션 또한 사람이 관여하는 것이기에 작자와 작자가 몸담고 있는 집단(혹은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가치중립성 혹은 객관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시뮬레이션이 대상이나 현상의 작동 방식 등을 모델링 하지만 기술적인 문제 등으로 시뮬레이션 대상의 특성 모두를 반영하지 않고 보다 단순화시킨다는 점 또한 고려해야 한다. 즉 자동차 운전 연습 시뮬레이션이라고 해서 실제 자동차 운전의 모든 시스템과 상황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울러 시뮬레이션이 보장하는 높은 수준의 참여와 상호작용도 여러 이유로(사용자의 기술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도, 학업수준, 경제적/시간적 여유, 경제적 이익 추구 등) 실제로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시뮬레이션과 관련한 이런 한계들에 더해 가장 큰 문제는 시뮬레이션에 대한 사람들의 무조건적 수용 혹은 부정이다. 즉 기술(문명)에 대한 맹신, 불신, 무관심에 기초에 시뮬레이션 자체가 갖는 가능성과 한계를 정확하게 보지 않고 무조건 옳다거나 혹은 그르다거나 하는 환상으로 시뮬레이션을 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뮬레이션과 게임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게임 역시도 자동차에서부터 사람의 행동이나 감정, 물리법칙에 이르기까지 현실 혹은 가상의 대상이나 현상 등을 모델링 한다는 점 그리고 게이머의 플레이에 따른 변수입력을 통해 결과를 얻고 그 결과에 대해 피드백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시뮬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게임이 전술한 시뮬레이션의 특성, 장단점 등 많은 내용을 공유한다는 것으로 게임이 단순한 놀이거리가 아닌 한국사회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즉 기존의 산업적 가치와 여가생활의 중심적 위치에 더해 게임을 통한 학습, 소위 에듀테인먼트의 중심으로서 단순히 영어 등 기존의 교과목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닌 비선형적 사고, 참여적 태도 등 디지털 사회에 요구되는 지각과 사고방식으로의 변화를 촉진하고 이를 익히기 위한 주요 매체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가능성 외에도 게임이 시뮬레이션으로서 갖는 한계 또한 생각해봐야 하는데 특히 게임의 경우 이야기(내러티브)가 결합되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의 가치중립성에 대한 환상이 심각하게 왜곡된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즉 사람들이 게임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수준의 규칙(테러리스트와 카운터테러리스트의 정형화된 복장 같은 게임의 표현 규칙에서부터 테러리스트를 섬멸하라 같은 게임 목표 규칙에 이르기까지)들을 게임 줄거리나 서브퀘스트 등 여러 이야기를 통해 그 필요성과 정당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로 인해 다른 규칙의 존재 등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기 보다는 특정 가치나 사고방식 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게임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동안 주인공 캐릭터 혹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왜’이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기 보다는 ‘어떻게’해야 하는 가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의 심각성을 생각할 수 있다. 예로 스타크래프트나 FPS 같은 게임들에서 제공하는 이야기들은 각 종작 혹은 세력간의 대립을 정당화시킴으로써 게이머들은 죄책감이나 공격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 없이 경쟁 종족(세력)을 공격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루두스 중심적 게임의 경우 게임 진행을 위해서는 게이머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게임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가 보다 쉽게 체화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스타크래프트란 게임의 경우 각 종작 간의 대립구도와 이의 해결을 목적으로 하는 상황에서 그 수단으로 오직 전투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게이머는 전투 말고는 다른 플레이 방식이 없는 것이다.
 
   아울러 게임이 다루는 소재나 주제 의식이 매우 제한된다는 점 또한 문제이다. 물론 영화나 소설 중에도 주제나 소재 면에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단순히 감각적 수준에서 표현하는 것들이 있기에 유독 게임만을 문제 삼는 건 공평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매체들이 그렇다고 해서 게임 또한 오직 그런 내용과 규칙들만으로 이뤄지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또한 많은 영화나 소설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삶과 사회에 대한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게임과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는 게임(또는 시뮬레이션)이 결과 산출을 목적으로 하는 실험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소설 등에 비해 구체적인 내용이나 감정을 전달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게임이 마약이나 저질오락 같은 오명을 벗고 게임의 가능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이와 같은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게임이 시뮬레이션의 긍정적 기능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괜찮은 그래픽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게이머들이 다양한 환경이나 대상과의 상호작용이 가능한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실적인 배경을 보여주고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를 갖는 게임이라 하더라도 게이머의 행동에 같은 말만 반복 하는 NPC와 총을 쏘든 폭탄이 터지든 아무런 변화도 없는 배경, 줄거리를 따라가기 급급한 게임이라면 이는 게임 시뮬레이션이라기보다는 하이퍼 픽션이나 인터랙티브 무비에 가까울 것이다. 인터랙티브 무비 등은 내용을 선택하고 구성한다는 측면에서 상호작용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정해진 내용 중에서 특정한 내용을 선택하고 그에 따라 결말이 정해지는 것일 뿐 세계 자체와의 상호작용은 제한되는 것이다. 게임만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족하더라도 구축된 세계와 상호작용 할 수 있는 매체는 아직까지 게임을 따라올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게임 규칙(혹은 시스템)의 생산과 수용에 대한 권한을 개발자와 게이머가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전술한 게임 시뮬레이션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인 동시에 게임 규칙 생산에 게이머들이 참여함으로써 게이머들의 관심사나 현실 사회의 여러 내용들을 게임 안으로 끌어들여 게임 규칙과 소재의 확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콘텐츠(혹은 규칙) 생산자와 소비자가 명확히 구분된 채 생산이 소수에 편중된 기존 사회에서 게임이 유튜브처럼 콘텐츠 생산과 유통의 매개체로 기능함으로써 생산자와 소비자가 결합된 소위 프로슈머(Prosumer)의 등장과 개별 사회구성원이 콘텐츠 생산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사회로의 전환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예로 삼국지란 게임을 에디터를 사용해서 새로운 시나리오를 만들거나 심즈에서 게이머들간에 캐릭터를 생산하고 공유하는 것 그리고 모드(MOD)게임들이나 몇몇 온라인 게임에서 UCC를 게임에 활용하는 것을 기획하는 등은 단순히 재미나 기존 게임의 재활용이 아니라 규칙생산에 대한 게이머 참여의 구체적 방법과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둘 수 있다.
 
   글머리에서 게임 본질에 대한 파악의 중요성을 얘기하며 놀이와 재미, 학습, 시뮬레이션과 게임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사람들마다 게임에 대해 여러 생각을 갖고 있겠지만 어느 경우든 간에 게임을 단순한 아이들 장난감이나 중독으로 인해 폭력 등 부정적 행위를 야기하는 마약 혹은 돈이 된다는 이유로 몰아닥친 일시적 유행으로 치부하기엔 아직 구현되지 못한 게임의 가능성이 많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 게임이 영화나 소설처럼 단지 정해진 규칙을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기존 또는 새로운 규칙의 생산과 생산 과정에의 참여 그리고 그 결과들에 대한 피드백을 허용하는 시뮬레이션 성격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인식에 기초할 때 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아직까지도 게임의 주요한 규칙인 명확한 선악 구분과 폭력의 정당화, 영토 혹은 점수경쟁, 기록 세우기, 단순한 패턴 익히기와 숙달, 현실문제에 대한 외면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또한 게임의 이야기 전달 매체로서의 기능과 특징에 대한 강조 역시도 재고해야 될 필요가 있다. 이는 전술한 내용들이 모두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런 요소에 게임이 너무 편중됨으로써 게임의 다양한 가능성이 제한되어 왔다는 것이다. 본인은 시뮬레이션으로서의 게임이 사람들의 소소한 관심사에서부터 현실의 다양한 내용들을 반영하고 토론과 여론 형성을 위한 매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게임의 미래에 대한 본인의 바람 혹은 예상이 있다면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게임에서 이러한 게임이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제 문제는 게임이 아니라 게임을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의지, 노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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