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만  게임물등급위원회 위원장 |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은 ‘플랫폼’이란 게임용어를 굳이 ‘게임환경’이라고 쓴다.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가능한 한 게임용어를 좀 더 정확한 전달력을 가진 우리말로 바꿔보려는 진지한 노력으로 짐작된다.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서양 인문사회과학 용어의 대부분이 중국과 일본에서의 번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개방이 늦었던 우리로서 기분이 좋건 나쁘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공부를 하다 보면 왜 이런 단어가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적지 않고, 특히 잘 된 번역어와 그렇지 않은 번역어에 대한 평가를 해보게 된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 나 ‘실존주의’ 같은 단어는 원어의 뜻을 매우 잘 살린 멋진 번역으로 보인다. 반면 필자가 생각하는 최악의 번역어는 ‘대통령’과 ‘박사’이다. 대통령의 원어 ‘president’는 회의를 주재한다는 ‘preside’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것을 클 ‘大’, 다스릴 ‘統’, 거느릴 ‘領’이라는 각기 너무 지배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글자들로 번역해 놓으니 그 단어의 고깔을 씌워주는 순간부터 이미 대통령은 전제군주라도 되는 것처럼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지배자로 변모하지 않았나 싶다.
 
   박사 역시 글자 선택이 아주 잘못된 경우란 생각이 든다. 서양에서 ‘doctor’는 ‘혼자서 책 읽고 학문을 해나갈 수 있는 기초자격을 받은 사람’이라는 정도의 뜻이다. 그것도 넓은 학문 분야 전반이 아니라 자신이 전공한 극히 좁은 분야의 전문성을 조금 인정해주는 정도다. 그런데 이 번역을 넓을 ‘博’자 박사로 해놓으니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공부가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박사를 높이 보고 대접하게 된다.
 
   사회가 그렇게 대접해 주다 보니 본인도 때로 그렇게 착각해서 미시 경제학 전공한 사람이 거시경제학 토론에 나가 큰 소리 치기도 한다. ‘doctor’의 보다 정확한 번역어는 좁을 薄자 박사라는 것이 필자의 오래된 주장이다. 세포 하나를 깊이 깊이 파고드는 사람이라는 뜻의 박사라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물에 보다 정확한 이름과 명분을 붙이는 것은 그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이 때문에 ‘모든 사물에 가장 합당한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는 일물일어(一物一語)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동양학에서도 사물의 명분과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을 중요시해서 이를 정명(正名)이라고 하며, 이것을 연구하는 학문을 정명학이라고 할 정도이다.
 
   게임 관련된 일을 시작한 지 석달 밖에 되지 않는 새내기인 필자가 용어의 중요성을 제기코자 하는 것은 게임산업계 전반의 용어가 너무 정리되지 않은 채 외국어, 외래어 일색이기 때문이다. 게임을 모르는 일반 국민들이 보기에 게임계는 뭐가 뭔지 알기 어려운 ‘당신들의 천국’이다. 일반 국민들 사이에 게임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것은 사행성과 과몰입 요소 때문이기도 하지만, 난해하고 국적불명인 용어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새로운 용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들어오고 새로 생겨나는 정보통신계에는 ‘정보통신용어 표준화 심의위원회’가 있어 그때그때 정보통신 표제어들을 표준용어로 확정하고 있다. 최근 이 위원회는 ‘UCC’를 ‘사용자제작콘텐츠’로, ‘Viewing Angle’을 ‘시야각’이라는 표준용어로 확정한 바 있다.
 
   10년의 매듭을 넘긴 게임계도 이제 용어정리에 본격적으로 나설 때가 됐다고 본다. 게임물등급위원회는 이 작업에 초석이라도 깔아볼 생각으로 최근 ‘게임용어 표준화 추진위원회’라는 내부 기구를 만들고, 한글학회를 비롯한 전문 관계기관과 손잡아 기초적인 용어정리를 시작했다. 작업과 연구결과는 정기적으로 공개해서 게임계 다양한 전문가들의 논의를 유도할 생각이다.
 
   실무적으로도 ‘게임물 등급분류 보고서’를 작성할 때, ‘필터링’을 ‘여과장치’로 바꿔 쓰는 등 나름대로 최대한 우리말 용어를 사용하고 보다 쉽고 정확한 용어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처음 나왔을 때 생경했던 ‘도우미’가 표준어로 사전에 등재되었고, 인터체인지를 ‘나들목’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아직 많지는 않지만 잘 만들어진 단어라는 생각이다. 게임계도 이제 미션, 몬스터, 캐릭터, 에뮬레이터, PK, PVP 등을 곱고 멋지며 그 개념에 가장 어울리는 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연구해야할 때이다.
 
 <keyman@grb.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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