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없고 '삼성'만 있었다
 
‘WCG는 삼성전자에 의한 삼성전자를 위한 삼성전자의 행사?’

지난 16일부터 20일까지 4일간 싱가포르 썬텍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월드사이버게임즈(WCG) 2005’를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WCG는 삼성전자(대표 윤종용)가 투자해 설립한 ICM(대표 정흥섭)이 주관, ‘사이버 게임 올림픽’을 표방하며 국내 게임산업 중흥을 꾀한다는 취지로 매년 열리고 있는 국제게임대회다.

이를 위해 문화관광부 장관이 조직위원회의 공동위원장으로 참여하고 매년 5억원에 달하는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회에 당초의 취지는 온데 간데 없고 오로지 삼성전자 마케팅 도구로만 활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이번 ‘WCG 2005’ 행사를 통해서는 그동안의 우려와 지적들이 한꺼번에 표출됐다. 주관사인 ICM이 WCG 주최사이자 메인스폰서인 삼성전자를 홍보하는 데만 주력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대회운영에는 미숙함을 드러낸 것이다. 더구나 대회의 주인공이 돼야할 선수단은 뒷전으로 밀린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기면서 ‘과연 WCG는 누구를 위한 게임대회인가?’라는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이같은 의문은 문화부의 참여에 대한 타당성 논란까지 불러오고 있다. 특정 대기업의 마케팅 행사로 전락한 게임대회에 정부 부처가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면서까지 지원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와관련 행사장을 다녀온 한 관계자는 “정부가 국내 게임산업이나 e스포츠 발전과는 거리가 먼 삼성전자 마케팅 행사에 들러리를 서준 꼴”이라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지난해 행사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던 만큼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태극기는 없고 삼성 로고만 가득

 이번 대회를 다녀온 관계자들은 ‘WCG 2005’가 과연 올림픽처럼 세계 각국의 국가대표선수들이 자국의 명예를 걸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국제대회였는가에 강한 의문을 던진다. 대회가 열리는 행사장 주변은 물론 도시 번화가 거리에는 온통 삼성전자 로고가 도배되다시피 걸려 있었고, 경기장 내부에도 WCG와 삼성전자를 비롯한 몇 안되는 월드 스폰서의 로고만이 가득한 반면 국제대회임을 알릴 수 있는 표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던 때문이다.

 실제로 주최측에서는 WCG와 삼성전자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지 않은 선수는 경기장 입장을 제한해 각국 선수단의 거센 항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주최측 입장에서는 대회 후원사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후원사가 아닌 기업의 로고가 새겨진 복장은 허용할 수 없다는 취지였지만, 각국 선수단은 이미 국가대표선발전을 치르면서 후원을 받은 기업의 로고가 새겨진 복장을 착용할 수 없어 난감해 진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경기장은 온통 WCG와 삼성전자 로고가 새겨진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선수들 일색이 됐다. 자국의 국기를 가슴에 단 유니폼을 입고 있어야할 선수들이 모도 WCG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경기장에 입장한 것이었다. WCG의 취지는 사이버 올림픽이었지만 정작 나타난 실상은 삼성전자가 세계 각국에서 WCG 대표선수들을 모아 집안 잔치를 벌인 모양새가 돼버렸다.

 이를 두고 한 관계자는 “국제게임대회라고 하면 세계 각국 선수들이 자국을 대표해 국기를 가슴에 달고 경기에 임하는 것이 정상일텐데 이번 대회는 모든 선수가 WCG 및 삼성전자 로고가 새겨진 동일한 복장을 하고 경기를 치러야 했다”며 “WCG는 국제대회가 아니라 삼성대회였다”고 비꼬기도 했다.

 더욱 황당한 일은 시상식 현장에서 벌어졌다. 타국의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자국 국기를 들고나와 응원을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유독 한국선수단은 시상대에 올라서는 순간에도 태극기 한장 꺼내들지 못했다. 한국 선수단을 관리해줘야 할 전략적파트너(SP)인 ICM이 준비를 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이를 두고 한 관계자는 “한국 SP인 ICM이 ‘미쳐 준비하지 못했다’고 밝혀 대회 관계자들을 어이없게 했다”며 “삼성전자 홍보물은 거리와 행사장을 도배할 정도로 들고 왔으면서 태극기 한장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힘들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 무성의한 선수단 운영

ICM의 무관심은 곧바로 한국선수단들의 고충으로 이어졌다. 특히 일부 어린 선수들은 현지에 체류한 일주일 동안 점심을 햄버거로만 때웠다고 밝혀 주변 관계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기도 했다. 이와관련 한 관계자는 “ICM측이 선수들에게 일비만 지급하고 식사는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으로 방치한 데다 선수촌 밖으로 나가는 것도 꺼려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같은 선수들을 보다 못한 취재진이 허락을 맡고 선수들을 데리고 나가 밥을 사주기도 했다”고 전했다.

한국팀을 돌봐야할 ICM이 행사를 주관하는 업체다 보니 선수단은 항상 뒷전으로 밀려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한국 선수단을 챙겨야 하는 몫은 대표팀 감독이 도맡아야 했다. 이에 대해 조규남 감독은 “선수들 점심식사를 비롯해 이것 저것 챙겨주는 것 쯤은 아주 사소한 일”이라며 “한국 SP인 ICM이 선수를 위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는 (대표팀 감독을) 안하겠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에 대해 한 e스포츠 관계자는 “이같은 문제는 ICM측이 무리하게 한국 SP를 고집한 데서부터 예견됐던 일”이라며 “이는 WCG나 대회를 주관하는 ICM이 한국 선수들을 그저 교통비를 주고 데려와 재주를 부리는 마케팅 도구로 밖에는 보지 않는 데서 나온 발상”이라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국산게임 시범종목 경기는 관중 한명 없이 쓸쓸하게 진행된 것으로 밝혀져 아쉬움을 더했다. WCG가 국산게임을 시범종목으로 채택한 것은 8개 정식종목이 모두 외산게임 일색이라는 지적을 무마하기 위한 전시행정에 불과했음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실제로 이번 싱가포르 대회에서는 온라인게임인 ‘프리스타일’을 시범경기로 선정해 경기를 치렀으나 네트워크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 경기 중에 극심한 랙이 발생하는 등 진행에 큰 차질이 빚어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더구나 결승전이 벌어질 때는 언제 어디에서 열리는 지에 대한 공지가 없었던 것은 물론 취재진들에게 조차 알리지 않은 상황에서 경기를 진행, 결승에 진출한 한국팀들이 관객 한명 없는 가운데 맥빠진 경기를 치러야 했다.

이와관련 현장을 다녀온 관계자들은 “국산게임을 널리 알려 차후 정식종목으로 채택될 수 있도록 보급한다는 당초 취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며 “지속적인 지원 이 없어 효과가 의문시되는 국산게임 시범종목이 이번에도 역시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는 순간이었다”고 씁쓸해 했다.

# 개최국 배불려준 문화부 예산 지원

결국 이번에 싱가포르에서 열린 ‘WCG2005’ 행사도 지난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대회와 마찬가지로 국내 게임산업 발전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효과라면 대회가 끝난 뒤 문화부 장관이 폐막식에 참석해 시상자로 나서는 정도의 생색을 낸 것이 전부다.

반면 EA와 블리자드 등 이번 대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게임 업체들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자사 게임을 전세계에 홍보하는 효과를 거뒀다. 이들 업체는 특히 대회기간 중에도 자사 게임 CD를 배포하는 등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이번 대회가 열린 싱가포르 현지에서는 이번 WCG 개최를 계기로 5500만 달러에 달하는 관광수입을 올렸다는 발표가 나왔다. 각국에서 모여든 선수단만 800여명에 달했고, 경기를 직접 지켜보기 위해 싱가포르를 찾은 관광객도 적지 않은데 따른 결과였다.

이와관련 행사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적어도 수십명의 팬이 좋아하는 프로게이머의 경기를 보기위해 싱가포르로 날아왔다”며 “이들이 현지에서 지출한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결국은 한국 정부가 싱가포르 관광수입을 올려주기 위해 5억원에 달하는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 꼴”이라며 “앞으로의 문화부 행보가 궁금하다”고 꼬집었다.

과거 WCG가 국내에서 열릴 때도 ‘WCG’가 삼성전자 행사라는 지적은 계속됐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외국 선수단이 한국을 찾아온 때문에 한국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됐고, 동시에 부수적인 경제효과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개최지가 외국으로 바뀐 이후에는 그나마 있던 효과들 마져 사라져 버렸다.

 WCG가 단순한 삼성전자의 마케팅 행사라면 더이상 정부가 참여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CG를 한국 게임산업과 e스포츠 발전에 도움을 주는 사이버 올림픽으로 육성하고자 하는 당초 취지를 살리겠다면 이에 걸맞는 대수술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순기기자(soonk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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