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의 투쟁 · 절대 권위에 대한 도전 상징하는 신
우리나라 삼실총 벽화와 읍내리 고분 변화에도 등장
 
동이계 종족의 영웅 치우의 신화에 이어 또 다른 한국신화의 원형을 살펴 보자. 치우와 더불어 황제군과 싸웠던 용사로는 거인 과보족(?父族)이 있다. 과보라는 말 자체가 거인을 의미한다.

‘과(?)’는 크다는 뜻이며 ‘보(父)’는 이 때 아비 ‘부(父)’가 아니라 남자 ‘보(甫)’의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과보족은 신농(神農) 계통으로부터 나왔다. 신농으로부터 땅 및 지하세계의 신인 후토(后土)가 나왔는데 과보족은 이 후토의 손자뻘 쯤 된다.

아득한 옛날, 세상의 동쪽에 거인 과보족이 살았다. 이들은 용맹할 뿐만 아니라 매우 달리기를 잘했다. 과보족은 항상 두 마리의 뱀을 몸에 감고 또 귀에도 두 마리 뱀을 걸고 다녔는데 이들은 과보족이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는 신비로운 뱀이었다. 또 그들은 언제나 지팡이 하나를 꼭 쥐고 있었는데 이 지팡이는 그들에게 언제나 가장 빠른 지름길을 알려주는 신통한 막대기였다.

 어느 날이었다. 들판에 누워 낮잠을 자던 한 거인의 눈에 하늘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무엇이 보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태양이었다. 무료하던 거인은 그것을 보자 문득 태양과 달음박질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상에서는 거인들만큼 빠르게 걷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새벽, 거인은 귀와 팔뚝에 신령한 뱀들을 두르고 지팡이를 쥔 다음 태양이 뜨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태양이 불덩어리 같은 모습을 동녘 산 위로 드러내자 거인은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 태양과 달리기 시합에 나서다
 
낯익은 고향의 산과 강들이 거인의 뒤쪽으로 사라져 갔다. 이제 눈앞으로는 낯선 풍경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해를 따라 뛰고 있었으므로 거인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낯선 나라들을 지나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려갔다.

귀가 길어서 잘 때 한쪽 귀를 요로 깔고 한쪽 귀를 이불로 덮고 자는 사람들이 산다는 섭이국(?耳國), 창자가 없는 사람들이 산다는 무장국(無腸國), 움푹 들어간 눈을 가진 사람들이 산다는 심목국(深目國) 등의 나라들을 구경할 새도 없이 빠르게 지나쳤다.

 다시 무릎이 반대쪽으로 향한 사람들이 산다는 유리국(柔利國), 외눈박이들이 산다는 일목국(一目國) 등의 나라들이 눈앞으로 스쳐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거인은 점차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태양은 여전히 힘차게 앞서가고 있었다. 갈 길은 아직도 많아보였다.

그러나 새벽부터 온 힘을 다해 달렸건만 거인과 태양과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거인은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다. 태양이 하늘 길의 중간에 이르자 뜨거운 열기가 거인의 한 몸에 내려 쪼였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열기에 거인에게 몸을 감고 귀에 걸려있던 뱀들도 축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 황하를 모두 마셔도 풀리지 않는 갈증
 
마침 황하의 물길을 따라 달리고 있던 거인은 갈 길이 한참 남았으니 빨리 목을 축이고 다시 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대로 엎드려 황하의 물을 바닥이 보일 때 까지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그런데 어찌나 갈증이 심했던지 그래도 성이 차질 않았다.

그는 다시 황하로 흘러들어오고 있는 위수(渭水)의 강물 까지 마셔버렸다. 그러나 황하의 작은 지류인 위수로는 갈증이 모두 해소되지 않았을 뿐더러 그 바람에 길 까지 돌아가게 되었다. 거인은 태양을 따라잡기 위해 꾹 참고 앞으로 내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태양은 이미 서쪽 끝의 연못 함지(咸池) 근처로 내려가고 있었다. 거인이 이제는 틀렸다 생각한 순간 아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갈증과 피로감이 한꺼번에 엄습해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작은 시내마저도 눈에 띄지 않았다. 거인은 북쪽 어딘가에 있다는 거대한 호수 대택(大澤)을 머리에 떠올렸다.

모든 새들의 고향이며 사방 천리나 된다는 큰 호수. 엄청난 물의 저장고인 그곳. 거인은 지치고 갈증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북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대택은 나타나지 않았다.

북쪽 어딘가라고 했지만 그곳은 생각보다 훨씬 먼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사방은 모래 먼지가 펄펄 날리는 건조한 벌판뿐이었다. 마침내 거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친 들판에 쓰러졌다. 거대한 몸이 넘어지는 바람에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 과보 죽은 후 지팡이가 숲으로 변화
 
쓰러진 거인은 더 이상 숨을 몰아쉬지 않았다. 그는 너무 심한 갈증과 피로 때문에 탈진해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죽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가 쥐고 있던 지팡이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팡이는 뿌리가 나오고 잎과 줄기가 생기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두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되었고 그것이 점점 더 가지를 뻗어 울창한 숲이 되었다. 그리고 쓰러진 거인의 몸은 그대로 산이 되었다. 이처럼 거인은 비록 태양과의 경주에서 져서 죽었지만 그 불굴의 혼은 다시 태어났다. 후세에 사람들은 그 산을 과보산이라고 부르고 그 숲을 등림(鄧林)이라고 불렀다.

우직한 거인의 이야기는 인류의 자연과의 투쟁 또는 절대적인 권위에의 도전을 상징한다. 과보족은 이 거인의 정신처럼 황제의 패권주의에 대항해 치우편에 서서 싸운다. 그럼 치우와 함께 전쟁에서 싸운 이후 과보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과보족은 같은 동이계 종족이 세운 나라인 고구려의 고분에서 무덤의 수호자로 나타난다.

집안의 삼실총 벽화와 경북 영주의 읍내리 고분 벽화에는 뱀을 몸에 감거나 손에 쥔 거인이 출현하고 있는데 과보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거인 과보족 신화가 한국신화의 원형 중의 하나라는 유력한 증거이다.

과보:수신 공공의 후예이며, 대지모인 후토를 직계 조상으로 삼고 있는 거인족.
십일 :동방 천신 제준과 해 모는 자 희화 사이에서 태어난 열 쌍둥이.황금 굴렁쇠 속에서 달리는 소년, 혹은 세발 달린 까마귀로 변신한다.
일목:유리국의 서쪽, 종산의 동쪽에 사는 외눈박이. 소호의 아들로 기장을 먹고 산다.
촉음 :종산의 신. 이 신이 눈을 뜨면 낮이 되고 눈을 감으면 밤이 되며, 입김을 세게 내불면 겨울이 되고 천천히 내쉬면 여름이 된다.
섭이:무장국 동쪽 나라에 사는 큰 귀를 가진 사람. 두 마리의 호랑이를 거느리고 다닌다.
흑치:이빨이 검은 사람들로 붉은 뱀과 푸른 뱀 한마리를 늘 거느리고 있으며, 벼농사를 짓는다.
도도:말을 닮은 동물로 매우 빨리 달린다.
작우:무게가 천 근이나 나가는 큰 소로 과보산에 산다.
암양 :키가 6척이 넘는 큰 양으로 나귀를 닮았고, 말의 꼬리가 달렸으며, 과보산에 산다.
적별:과보산에 사는 붉은 꿩으로 불을 막는 능력이 있다.
 
정재서(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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