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터지 영상미학으로 그려낸 '사랑의 욕망'
 
데뷔작 ‘로드무비’로 우리들의 기억 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김인식 감독의 두번째 작품 ‘얼굴 없는 미녀’는 사랑의 집념과 욕망의 구현에 관한 팬터지를 뛰어난 미장센으로 풀어낸다. 글래머 스타 김혜수의 노출신에 세간의 관심이 모아졌지만 김인식 감독은 그런 스캔들을 가볍게 뛰어넘어 자신만의 독창적 컬러로 집요하게 주제를 밀어붙인다.

중요한 것은 ‘김혜수가 어디까지 벗었냐’는 것이 아니다. 김혜수의 노출 수위와 섹스신의 표현수위에 관심이 집중된다면 ‘얼굴 없는 미녀’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감독에게 주어진 도전은 ‘얼마나 치열한 주제와 영상으로 세속적 관심을 뛰어넘을 것인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김인식 감독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우리들의 영혼에 치명적 독을 남기는 영상으로 대답한다.

‘얼굴 없는 미녀’는 부분 기억 상실과 정체성의 혼돈을 겪고 있는 경계성 장애 환자 지수(김혜수 분)를 전면에 내세운 미스터리 멜러다. 그러나 미스터리적 속성은 매우 약하다.

지수에게는 세 남자가 있다. 결혼 전 불꽃처럼 사랑했던 남자 장서(한정수 분), 외환딜러인 남편 민석(윤찬 분), 그리고 지수에게 상담을 해주는 정신과 전문의 석원(김태우 분). 지수를 괴롭히는 것은 과거의 상처다. 야간스키장에서 만나 뜨겁게 정사를 벌였던 장서는 왜 갑자기 지수 곁을 떠났을까.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현재의 남편 민석은 외환딜러 동료인 해영(김영애 분)과 밀회를 갖는다.

영화의 중심축은 지수와 그녀가 정신과 상담을 받는 석원이다. 석원의 상처는 같은 병원 마취과 의사였던 아내 희선(김난휘 분)이 의료과실로 괴로워하다가 자살했다는 것이다. 희선에게도 숨겨진 남자가 있었지만 그 남자는 희선의 자살 사실을 모르고 자신이 버림받은 줄 알고 괴로워한다. 인간은 서로의 상처를 드러낼 때 쉽게 가까워진다. 석원과 지수는 각각 자신들의 상처를 드러내면서 가까워진다.

1980년 TBC TV의 ‘형사’ 시리즈 중 납량특집 드라마로 등장했던 ‘얼굴 없는 미녀’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이 영화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뛰어난 비주얼 효과에 있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지배적 색상은 레드와 블루다. 피와 불꽃같은 뜨거운 정열을 상징하는 레드와, 물과 얼음 같은 차가운 이성을 상징하는 블루의 조화는 너무나 탁월해서 오히려 시각적 효과가 먼저 인물들의 개성을 끌고 가거나 내러티브의 전개를 앞질러 가는듯한 느낌까지 준다.

김인식 감독은 경계성 장애를 앓고 있는 지수의 심리상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파도처럼, 아지랑이처럼, 울렁거리는 화면을 자주 등장시키고 있으며 차가운 금속이나 유리 등에 반사된 지수의 다중적 모습을 빈번하게 연출한다. 지배색깔은 강렬한 선홍빛의 레드다. 지수의 집은 15도 정도 기울어진 벽면과 기둥으로 위태한 그녀의 내적 상태를 표현한다. 미니멀리즘이 지배하는 텅 빈 실내, 그 속에서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는 지수의 욕망은 레드 컬러로 강렬하게 형상화됐다.

또 ‘석원클리닉’의 지배 색깔은 블루다. 정신과 의사 석원의 이성적이고 차가운 느낌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유리나 금속 같은 재질로 차갑고 도회적인 세트가 설정됐다. 계단을 밟아 올라갈 때마다 피아노 음이 울리는 석원클리닉의 피아노 계단, 잎이 거의 없는 앙상한 가지만으로 이뤄진 창 밖의 나무들은 캐릭터의 내면을 외부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특히 예전의 작품과는 다르게, 낮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삶의 무미건조함과 삶의 열정이라는 이율배반적 모습을 표현한 김혜수의 연기는 주목할만 하다. 아마도 지금이 그녀 연기 인생의 절정일 것이다. 아쉬운 것은 내러티브가 너무나 밋밋하다는 것이다. 미스터리적 속성이 강조됐거나, 각 캐릭터의 심층적 내면탐구가 더 이뤄졌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의 미학적 성취도는 최근 제작된 한국 영화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우리는 또 한사람의 작가주의 감독을 얻었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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