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인생 프로야구 2군선수의 순박한 사랑 그린 수작
 
영화 감독으로서 장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가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무대의 제한된 공간(편집되지 않는 공간)과는 달리 파편적으로 해체된 각 부분을 하나로 연결하는 영화적 공간(편집되는 공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막힌 사내들’ ‘간첩 리철진’ ‘킬러들의 수다’ 등 장진의 영화는 재치와 유머가 빛을 발하고 있는 세부묘사의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일관된 흐름, 유연한 리듬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치명적 약점이었다. 선형적으로 지속되는 시간과 제한된 공간을 갖고 있는 연극 연출에 익숙한 감독들은 비선형적 시간의 흐름과 파편적인 영화적 공간에 낯설어한다.

막이 오르고 다시 막이 내릴 때까지 한 공간에서 지속되는 시간 안에서 서사구조를 짜는 연극과는 달리 영화 연출은 공간을 넘나들며 그것도 서사적 순서와는 무관하게 비순차적으로 촬영됐다가 편집되는 제작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장진은 ‘아는 여자’에서 비로소 연극 연출가 출신 영화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린다. 우리는 ‘아는 여자’의 어디에서도 연극적 연출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이제 그는 이미지로 사고하고 파편적으로 흩어진 그 이미지들을 하나로 연결하며 그것으로 일관된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영화감독이 됐다.

‘아는 여자’는 한 동네 살면서 오랫동안 한 남자를 짝사랑해 온 여자 한이연(이나영 분)과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프로야구 2군 선수 동치성(정재영 분)의 눈물나는 사랑 이야기다. 코믹한 요소는 예전 장진의 영화처럼 반 박자 뒤에 웃음을 터트리게 하지 않고 적재적소에 박혀 관객들의 허를 찌르며 곧바로 유효타를 만들어낸다.

낙엽진 숲 속을 다정히 손잡고 걷는 연인의 데이트로 시작하는 첫 장면부터 그는 우리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훨씬 더 능청스러워졌다. 딱 필요한 부분만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감췄다 결정적 순간에 터트리는 기교도 늘었다. 파편적으로 흩어진 각 신 사이에 그것들을 연결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숨겨 놓았다가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체적인 극의 호흡 조절을 한다.

웃음은 타이밍이다. 장진은 캐릭터의 개성으로 상황의 언밸런스로 웃음의 파도를 타기 시작하다가 가끔씩 거대한 해일 같은 웃음을 잠복시켜 놓는다. 가벼운 잽을 날리다가 결정적 어퍼컷을 날리는 권투선수처럼 그는 관객의 성감대를 예민하게 짚어내 그로기 상태까지 몰고 간다.

남자의 집에서 39 발자국 떨어진 곳에 여자의 집이 있다. 10년 동안 한 남자를 지켜본 여자 스토커의 등장은 영화에 돌연 활기를 불어 넣는다. 정재영은 우직하면서도 순박하고 눈물 있으면서도 웃음을 던질 줄 아는 폭넓은 연기를 보여준다. 인형 같던 이나영의 얼굴에서는 사람 냄새가 묻어나온다. ‘아는 여자’에는 진정성이 있다. 웃음과 눈물의 조화 속에서 삶의 속살이 부끄럽게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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