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만 있고 '사람'은 없었다
기억상실의 트릭 · 물의 상징성 못 살려 겉돌다 끝내
 
‘월하의 공동묘지’로 대표되는 한국판 공포영화는 이승에서 억울하게 죽은 혼령이 차마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한을 풀기 위해 지상을 떠도는 줄거리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동안 대중들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던 한국 공포영화를 되살린 것은 ‘여고괴담’이다.

사춘기 여학생들의 불안한 내면과 공포 장르가 효과적으로 만나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던 여고괴담 이후 공포 장르는 한국 장르 영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제목 자체부터 혼령의 줄임말인 ‘령’은 한국적 귀신 이미지를 강렬하게 내뿜는다. 령의 여주인공들은 여고괴담의 여고생보다 조금 더 성숙한 여대생들이다.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사회학과 2학년 민지원(김하늘 분)의 주변에서 의문의 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령의 내러티브는 공포 영화 장르의 법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사건을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은 그들 친구의 원혼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정도 서사구조는 공포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 새로운 공포를 불러일으킬 매력적 요소로 작용할 수 없다. 령의 트릭은 기억상실이다. 민지원의 어제와 오늘, 즉 기억을 잊어버리기 이전과 현재의 모습이 갖고 있는 편차에 핵심적 요소가 숨어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 묘사돼야 했던 것은 지원의 소꿉친구 수인(남상미 분)의 외로움이다. 만약 이 부분이 살아났다면 령은 좋은 작품으로 오래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령의 공포가 말초적이고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인간의 이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인의 외로움은 절실하게 묘사돼 있지 않다. 토대가 튼튼해야 그곳에서 기원하는 공포와 긴장의 강도가 훨씬 절실해지는 것이다.

령에서 물의 이미지는 매우 중요하다. 사건의 핵심이 일어나는 공간은 깊은 산 속의 물웅덩이다. 차례로 죽어가는 여고시절의 친구들은 실내에서 사체가 발견돼도 모두 익사상태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물의 이미지가 갖고 있는 상징성이 더 깊게 탐구됐어야만 했다.

단순히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는 장식적 차원이 아니라 공포의 심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요소로 확산돼야만 했다. 그러나 령은 아쉽게도 물 밑바닥에 숨어 있는 공포의 바닥까지 내려가지 못한다. 물 표면을 스쳐 지나가는 물수제비처럼 공포의 살갗만 스쳐 지나갈 뿐이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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