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무협 소설의 거목
게임 개발 '장풍 대작전'
 
한국 신무협 소설의 개척자 좌백(左栢, 본명 장재훈·39)이 최근 게임 개발이라는 이색 외도에 나서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95년 ‘대도오’로 데뷔해 실존주의 무협 소설이라는 새지평을 연 좌백은 국내 무협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이다. 대만작품의 아류에 머물던 국내 무협 소설을 문학작품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호평을 받을 정도로 그의 업적이 눈부시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최근 집필을 잠시 중단하고 온라인 게임업체의 콘텐츠 이사로 자리를 옮겨 주목을 받고 있다. 인디21이 개발 중인 무협 온라인 게임 ‘구룡쟁패’의 시나리오와 콘텐츠 기획을 총괄하며 ‘무협 다운 무협게임’ 만들기에 나선 것. 무협소설의 대가인 좌백이 만든 무협 게임이 과연 어떤 모습일까라는 점에서 더욱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실존주의 무협 소설가

좌백의 무협은 우리가 생각하는 무협소설과는 다르다. 대중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무협소설은 천박하기 그지없다. 명문가 출신의 주인공이 가문의 복수를 위해 하늘을 날며 칼을 휘두르는 허무맹랑한 스토리를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좌백의 무협은 하층무사들이 먹고 살기 위해 무술을 배우고 생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차분하고 간결한 필체로 그려내 호평을 받고 있다. 한국 무협소설계에 이른바 ‘신무협’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서울대 전형준 교수는 소설평을 통해 “좌백의 작품은 하층무사들을 통해 기성질서에 대한 유쾌한 조롱을 내뱉는가하면 칼을 쓰면서 생의 본질을 깨닫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며 “대만 무협 소설의 아류가 주를 이루는 한국 무협 소설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실존주의 작품”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의 업적을 평가받은 덕택에 그의 첫 작품인 ‘대도오’는 출간 10년을 맞는 올해 고품격 소장본으로 시공사를 통해 재출간되는 영광도 얻었다.

# 좌백은 게임 매니아

좌백을 만나기 전까지 무협에 대한 문외한인 탓에 기자는 그가 특이한 외모와 복장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처음 만난 그는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저씨’ 타입 그대로였다. “작가가 게임을 알면 얼만 알겠어”라는 편견도 그를 만난지 5분 만에 무너졌다. 기자 보다도 게임에 더 깊은 조예를 갖고 있는 그의 말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가 좌백이 게임과 인연을 맺은 건 순전히 아내 때문이다. 아내 진산도 좌백과 함께 무협소설을 쓰는 작가. 진산은 텍스트 중심으로 진행된 머드게임 시절부터 온라인 게임에 빠져있던 매니아라고 한다.

“남편과 있는 것 보다 게임을 더 좋아하던 아내와 다투기도 하고 ‘게임과 남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위협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아내가 무엇에 열광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게임을 시작해보니 의외로 많은 매력을 담고 있더군요”

우여곡절 끝에 게임과 인연을 맺게 된 좌백은 진산과 함께 게임을 즐기는 단계까지 금새 발전했다. 급기야 팬터지 위주의 온라인 게임을 보며 “무협을 배경으로 한 게임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지난 2000년 인디21측에서 좌백의 소설에 반해 게임 개발을 제의한 것이 ‘구룡쟁패’ 프로젝트의 시작. 하지만 좌백은 “게임은 스토리 보다 세계관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기존 소설을 게임화하는 것보다 새로운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 기획한 것이 바로 ‘구룡쟁패’다.

# 무협 다운 무협게임

“기존 무협 게임들은 팬터지의 틀에서 무협을 보는 오류를 쉽게 범하곤 했습니다. 전형적인 팬터지의 직업이나 세계관에 무협의 요소를 일부 도입한 것에 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협은 분화가 아니라 통합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세계관부터 팬터지와 달라야 합니다. 무협에 방어구가 등장하고 직업이 구분되고 정파와 사파가 도식적으로 구분된다면 이는 진정한 무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픈베타를 눈앞에 두고 있는 ‘구룡쟁패’가 기존 게임들과 가장 다른 점도 좌백이 강조하는 게임의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이른바 무협다운 무협세계를 그린다는 것. 기존 무협 게임들이 흥행을 위해 팬터지와 무협을 적당히 버무리는 타협을 취했다면 ‘구룡쟁패’는 철저히 무협만을 고집하고 있다. 도식적인 직업 구분을 탈피해 사용자들이 재량에 따라 게임 내의 삶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대신 소림, 비궁, 무당, 마교 등 문파시스템을 도입해 무공과 캐릭터의 다양성을 맛볼 수 있게 했다. 문파 뿐만 아니라 몬스터들도 팬터지의 그것과는 다른 독특한 모습을 보일 뿐만 아니라 각 문파와의 은원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등 무협의 세계관을 충실하게 반영했다. 또 무협의 근간인 도교의 사상과 이론체계를 게임에 접목, 기존 게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체험할 수 있다.

# 무협을 총괄하는 ‘룰북’ 만들터

“오픈베타를 앞두고 있다보니 최근에는 퀘스트를 만드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게임 속 또 다른 게임의 개념으로 퀘스트를 만들어 사용자가 이를 풀다보면 한 편의 무협소설을 본 듯한 느낌을 제공하고 싶은 것이 욕심입니다.”

게임의 정식 오픈을 앞둔 현 시점은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미묘한 시기. 하지만 좌백은 의외로 낙관적인 전망을 갖고 있다. 흥행 여부와 게임성에 대한 평가는 유저들과 전문가들이 선택할 몫이지만 무협다운 세계관을 게임 속에 구현하는 데 노력했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는 것이다.

“팬터지 게임에 익숙한 유저들에겐 ‘구룡쟁패’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국내에서도 무협이 큰 인기를 누렸던 전례가 있는 만큼 온라인 게임에서도 좋은 반응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룡쟁패’ 프로젝트가 끝나면 좌백은 무협의 세계관과 규칙들을 정리한 ‘룰북’을 만들 계획이다. 무협을 낯설게 여기는 서양인들도 쉽게 친숙해 질 수 있도록 일종의 가이드북을 만들겠다는 것.

‘대도오’가 국내 무협소설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것처럼 ‘구룡쟁패’가 팬터지 일색의 국내 게임 시장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 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태훈기자(taehu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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