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서리·벼락 등 모든 기상 주관하는 권력과 위엄의 상징
 
염제의 집안에 불행한 일들이 잇달아 생기고 세상에 불길한 짐승들이 자주 출현했던 것은 자비로운 신 염제의 다스림이 점차 질서를 잃어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염제는 알다시피 허약하기 그지없던 인간에게 불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어 모든 짐승들을 제압할 수 있게 해주었고 농사의 기술을 가르쳐 주어 충분한 먹거리를 확보하게 해주었으며 약초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주어 질병에 대한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인간들은 이로 인해 모든 만물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되었고 그 어느 때 보다도 편안한 삶을 누렸다. 문제는 바로 이 인간들로부터 생겨났다. 편안한 삶 속에서 교만함과 나태함이 싹텄던 것이다.
인간들은 전처럼 신들에 대해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게 되었다. 본래 인간들은 큰 나무나 높은 산의 정상을 통해 하늘을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신들의 부름에 의해서나 인간 자신의 절실한 문제가 있을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하늘 길을 다니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별 일 없어도 수시로 하늘에 올라와 신들의 처소를 시끄럽게 하는 일이 많아졌다.
뿐만이 아니었다. 힘이 약하고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는 함께 사이좋게 살던 그들이 생활이 좀 넉넉해지자 패를 지어 싸움질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점차 태고의 그 경건함과 순박함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자비로운 염제는 인간들의 이러한 변모에 대해 여전히 너그러운 자세를 잃지 않았다. 염제는 가만히 두어도 인간들이 다 알아서 스스로 질서를 찾아나갈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염제는 인간들의 질서가 다소 흐트러졌다고 해서 그것을 곧 힘으로 억누르거나 강력한 법으로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이상 결국 자연의 법도를 따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 염제의 생각이었다. 염제는 인간의 자율적인 능력을 믿었다.

동쪽 지역의 염제 휘하에 있던 신들은 대부분 염제의 이러한 생각에 의견을 같이 했다. 대륙의 젖줄인 황하 하류 지역의 풍요로운 땅을 다스리던 이들 동방의 신들은 대체로 마음이 너그러웠다. 그러나 황하 상류인 서쪽의 건조한 사막과 산악을 다스리던 서방의 신들은 이와 같지 않았다.
황량한 오지를 강력한 힘으로 다스려온 이들 신들은 엄격했다. 그들은 인간들의 교만에 분노했고 점차 질서를 잃어가고 있는 이 세계를 개탄했다. 아울러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염제를 인자한 것이 아니라 무능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들은 염제가 애초 우매한 인간들에게 불과 같은 신들의 전유물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조절할 능력이 없는 인간에게 불과 같은 위험한 물건을 주다니. 그것은 결국 신들의 세계를 위협하고 인간 자신들을 파괴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인간이 자율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그것은 염제의 어림도 없는 순진한 생각일 뿐이었다. 신의 세계이든 인간의 세계이든 질서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강력한 힘과 권위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어리석은 인간들의 저 혼란을 수습하고 신들의 세계를 넘보는 저 교만함을 응징하지 않으면 안된다. 서방의 대부분의 신들은 이렇게 생각했고 이러한 그들의 배후에는 한 명의 막강한 힘을 지닌 존재가 있었으니 그가 곧 곤륜산의 신 황제(黃帝)였다. 그는 헌원국(軒轅國)이라는 나라의 인간들을 숭배자로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헌원씨(軒轅氏)라고도 불리었다.

그렇다면 황제는 어떠한 신인가? 황제의 모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묘사들이 전해온다. 얼굴이 넷이었다고 하는데 인도의 창조신인 브라흐마와 같은 얼굴 모습이다.
중앙에 위치하여 사방을 관찰하는 지배자의 형상이 아닐 수 없다. 누런 용의 몸체를 하고 있다고도 하였는데 누런 것은 그가 흙의 기운을 주재하기 때문이고(그래서 황제이기도 하다) 용인 것은 그가 구름·비·바람·이슬·서리·무지개 등 모든 기상 현상을 주관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벼락의 신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큰 신인 제우스의 무기도 벼락이었다. 벼락은 큰 신들의 권력과 위엄을 과시하는 무기이다.
황제가 다스리는 헌원국(軒轅國)이란 어떠한 나라인가? 세상의 서쪽 끝, 무당들의 나라인 무함국(巫咸國) 보다도 북쪽에 있고, 그 북쪽 어디엔가 있다는 여자들만 사는 나라 여자국(女子國)보다도 더 북쪽에 있는 궁산(窮山), 그 산의 끝자락에 있다는 불사인(不死人)들의 나라, 그곳이 바로 헌원국이었다.
헌원국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을 하고 있었고 그 꼬리는 늘상 위로 말려져 머리 위에 드리워진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에는 꼬리를 머리 위로 둥글게 만 뱀이 그려져 있었다. (뱀은 해마다 껍질을 벗고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기에 옛 사람들은 영생 불멸하는 동물로 여겼다.) 헌원국의 서쪽엔 그들의 위대한 임금이며 신이기도 한 헌원씨(軒轅氏)가 세상에 강림했던 자리, 헌원국 사람들의 발상지인 헌원의 언덕 곧 헌원구(軒轅丘)가 있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언덕은 큰 신들의 제단이 그런 것처럼 4개의 모서리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각각의 모서리에는 신성한 뱀들이 똬리를 틀고 단을 에워싼 채 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신들이 내리거나 솟아난 성소(聖所)는 언제 어디서라도 존경을 받아 마땅한 법이다.
그래서 헌원국 사람들은 헌원의 언덕이 있는 서쪽으로는 감히 활을 겨누지 못한다고 했다.
 
정재서((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저작권자 © 더게임스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