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신 ‘천오’·우레의 신 ‘신뢰’의 노여움으로 물난리, 천둥 덮쳐
 
사랑하던 두 딸이 졸지에 꽃과 새로 화생(化生)해 곁을 떠나자 염제의 슬픔은 감당할 길 없이 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둘째 딸이 또 다른 비극을 겪지 않고 잘 자라준 것이었다. 그러나 둘째 딸도 언니들의 사건에 충격을 받은 듯 속세에 마음을 두지 않더니 결국 적송자(赤松子)라는 현자를 찾아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적송자는 밥 대신 수정을 복용하였는데 비바람을 일으키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범한 도술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후일 적송자로부터 불사의 도를 배워 영생불멸의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불길한 사건은 염제의 집안에 그치지 않았다. 갖가지 재난이 하늘과 땅 사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판천의 들판을 덮쳐왔다. 지나치는 모든 곳의 풀과 나무를 말라 죽게 한다는 명사(鳴蛇)와 나타나는 곳마다 큰물이 진다는 화사(化蛇) 같은 흉한 짐승들이 판천의 들 곳곳에서 번갈아 모습을 보였다. 가뭄을 멈추는 단비가 내리는가 싶으면 이내 큰물이 졌고 비가 그치는가 싶으면 눈을 뜰 수 없는 미친 바람이 불어왔다. 딸들을 여읜 슬픔으로 마음의 병을 앓을 겨를도 없이, 염제는 몰려오는 재난을 막기 위해 사람들의 마을 이곳 저곳을 쉴 새 없이 뛰어다녀야만 했다. 그 못지않게 비탄에 잠긴 아내 청요(聽?)는 가는 곳마다 눈과 서리를 내렸고, 한 때 그를 그림자처럼 따랐던 불의 신 축융(祝融)은 저 먼 남쪽 나라로 떠나서 돌아오지 않은 지 오래였다. 염제는 외로웠고 지쳤고 누구보다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했다.

사실 하늘의 형벌과 자연의 재난 등 심상치 않은 조짐은 판천의 들만이 아니라 눈을 돌리면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었다. 백옥(白玉)과 은(銀)이 많이 난다는 저 서쪽 땅의 녹대산(鹿臺山)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수탉 같은 부혜(鳧?)라는 새가 산다고 했다. 이 새가 나타나면 그 곳에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새를 무척 꺼렸다. 더 서쪽으로 떨어진 소차산(小次山)이라는 곳에는 원숭이같이 생기고 흰 머리에 붉은 다리를 가진 짐승이 있는데 그 이름을 주염(朱厭)이라고 했다. 이 짐승 또한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는 흉수(凶獸)였는데, 좀처럼 사람 사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이런 짐승들이 자주 출몰하며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상한 조짐은 신들에게서도 보였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모든 자연에 속한 의지로 움직이는 자연신들, 세상이 평화로운 때면 누구보다 온화하고 다정하고 상냥하지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누구보다 먼저 그것을 알아채고 예민해지거나 신경질적이 되는 민감한 동물신들도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예를 들어, 저 머나먼 동쪽 땅, 해를 향하는 골짜기, 쌍무지개 북쪽에 있는 두 강물 사이에 산다는 물의 신 천오(天吳)의 변화가 그런 것이었다. 청황색의 등을 가진 호랑이 같은 몸에 8개의 다리와 8개의 꼬리와 8개의 사람 머리를 지니고 있는 신 천오, 그는 이 세상 모든 물들의 길라잡이 신이었다. 그는 언제나 고요한 시선으로 온 땅을 적시고 흘러내린 물들이 모여 땅 끝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지를 지켜보는 온순한 신이었다. 그는 8개의 꼬리로 세상 모든 물의 물길을 터주고 그것들이 돌아가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지 16개의 눈으로 지켜보아야 하는 힘든 일을 군소리 한번 없이 맡아보던 무던한 신이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인가부터 맡은 바 소임을 게을리 하고 난폭하게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천오가 잡아주지 않는 물길은 점차 다니던 길을 바꾸어 엉뚱한 곳을 덮치기도 하고, 막혀서 바닥을 드러내기도 하고,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역류를 하기도 했다. 그러자 지상의 곳곳에서 물난리가 나고 해일이 몰아쳤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저기 저 동쪽 땅 한가운데 뇌택(雷澤)의 깊은 물 속에 가라앉아 하늘과 땅만큼 아득한 시간 동안 잠들어 좀처럼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우레의 신, 뇌신(雷神)이 깨어나고 말았다. 땅 위의 물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수선하게 소란을 피우는 동안 그가 헤설픈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용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는 그 신은 긴 머리칼과 수염을 떨치면서 아득한 시간 동안 굳어져 있던 몸뚱아리를 떨치고 일어나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뇌신이 무시무시한 발톱이 달린 4개의 발로 자신의 배를 두드리자 세상의 모든 것들이 찌렁찌렁 울릴 정도로 굉장한 우레 소리가 하늘과 땅 사이에 울려 퍼졌다. 산속의 동물들과 들에 핀 꽃들조차 두려움에 몸을 떨었고 모든 사람들이 뭔가 아직은 알 수 없는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땅 위와 땅 아래에 속한 모든 신과 정령·요괴·도깨비·귀신들조차 그 우레 소리가 나는 동안은 땅에 붙은 듯이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머지않아 일어나게 될 끔찍한 일들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재서(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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