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신화의 하늘 최고신 환인(桓因)과 맥락 닿아
 
지난 호에는 동양신화의 원천인 ‘산해경’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제부터는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의 아주 오래된 시절에 활약했던 신들의 세계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아득하고도 먼 먼 옛날에, 세상에는 오직 혼돈(混沌)만이 존재했다. 그것은 하늘도 땅도 물도 아니었으나 하늘인 것도 같고 땅인 것도 같고 물인 것도 같은, 아무것도 구별되지 않은 채 맞붙어 있는, 어쩌면 아무것도 없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런 세계였다.
그런데 엄청난 세월이 흐른 후 그런 혼돈의 와중에서 무거운 기운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가벼운 기운은 위로 올라가더니 하늘과 땅의 구분이 생겼다. 다시 또 얼마나 아득한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러더니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엉기면서 신이 태어나고 세상 만물이 생겨나고 인간이 태어났다.
신들이라고 해서 모두 평등한 것은 아니었다. 신들 중에도 큰 신이 있고 작은 신이 있었다. 이들 큰 신과 작은 신들은 하늘과 땅을 대신하여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었다. 신들은 해와 달과 별의 운행을 감독하거나 산과 강을 다스리고 비, 구름, 우레 등을 조절하여 자연이 절도를 잃지 않도록 했고 사냥, 농사짓기, 토기 굽기 등의 생업과 각종 도구를 제작하는 기술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위대한 동방의 신 ‘제준’
 
동방 민족의 큰 신으로서 먼 훗날까지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된 존재는 제준(帝俊)이라는 천신(天神)이었다. 그는 동방의 수많은 신과 종족들의 조상이기도 하다. 해가 떠오르고 달이 지는 곳, 동쪽의 하늘을 맡고 있던 큰 신 제준은 오색찬란한 깃털을 가진 새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새의 머리에 사람의 몸, 또는 새의 머리에 원숭이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 신의 가장 큰 특징은 한 눈에 들어 있는 두 개의 눈동자였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이 신이 본래의 모습을 버리고 사람이나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여 나타나더라도 주의해서 그 눈을 살펴보고는 제준이라는 것을 곧 알아채곤 했다.
위대한 동방의 신 제준에게는 부인이 여럿 있었다. 그중의 하나는 해의 여신인 희화(羲和)였고 다른 하나는 달의 여신인 상희(常羲)였다. 그런데 희화는 제준과의 사이에 열 쌍둥이의 아들을 낳았다. 이들 열 명의 아들은 머나먼 동방의 양곡(湯谷)이라는 골짜기에 있는 부상(扶桑)이라는 거대한 뽕나무에서 매일 교대로 떠올라 지상을 비추었다. 그리고 상희는 제준과의 사이에 열두 쌍둥이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 열두 명의 아들은 매달 한 명씩 교대로 떠올라 밤을 비추었다.
달의 여신인 상희는 열두 명의 달 쌍둥이 외에도 지(摯)라는 이름의 큰 신을 낳았다. 지라는 이름은 매나 수리 따위의 크고 사나운 새를 말하는 것인데, 그 신의 본 모습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이 커다랗고 사나운 새의 모습을 한 신은 저 먼 동쪽 바다 끝에 새들의 나라를 세웠던 소호(少?)라고 했다. 그 나라는 백성들도 새였지만 조정의 관리들도 모두 새였다고 한다. 이 소호의 자손 중에는 활과 화살을 만든 반(般) 같은 사람이 있었다.
이밖에도 제준의 자손 가운데는 거문고를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 안룡(晏龍), 처음으로 배를 만들었다는 번우(番?), 처음으로 나무 수레를 만들었다는 길광(吉光)같은 이가 있었다. 그리고 몸빛이 희고 승황(乘黃)이라는 신비한 짐승을 타고 다니는 백민국 사람들도 제준의 후예였다. 승황은 전에 얘기한 바 있듯이 한번 타면 2000살까지 살게 된다는 불사의 짐승이다.
동방의 큰 신인 제준은 우리 단군 신화에서 환웅(桓雄)을 하계에 내려 보낸 하늘의 최고신인 환인(桓因)을 떠올리게 한다. 제준과 소호가 모두 새와 관련된 모습을 하고 있다는 내용은 우리 민족의 조류숭배(鳥類崇拜) 관념을 연상시킨다. 고구려 무사들이 모자에 새깃을 꽂고 있는 모습이라던가 삼한(三韓)에서 장례를 지낼 때 관속에 큰 새깃을 집어넣었다는 풍습, 무속에서 새를 숭배하는 관습 등이 그것이다. 아울러 소호의 자손인 반이 활과 화살을 처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활을 잘 쏘는 주몽을 비롯 “큰 활을 멘 동쪽 사람”이라는 ‘동이(東夷)’의 글자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몸빛이 희다는 백민국 사람들이란 흰 색을 좋아하고 흰 옷을 잘 입는 우리 민족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고구려 오회분 벽화에서는 수레의 신 길광으로 추정되는 신도 출현하고 있어 우리는 여러 방면에서 제준 관련 신화가 한국 신화의 원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정재서(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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