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고시촌에 형성된 새로운 게임 풍속도
 
고시생들은 고시를 준비하는 일을 ‘땅굴을 판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만큼 언제 끝이 날지를 모르는 답답한 과정이라는 의미를 함축한 표현이다. 그래서인지 고시생들은 잡기에 능하기로 유명하다. ‘포커’를 해도, ‘당구’를 쳐도 실력이 만만치 않다. 정신 없이 공부에 몰두하다 잠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즐기는 놀이 조차도 그들에게는 공략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스타크래프트’는 물론이고 각종 온라인게임의 경우, 초창기 최고수는 대부분 신림동 고시촌에 몰려있었다. 실제로 신림동 고시촌에 뭍혀사는 고시생들은 프로게이머가 나타나기 이전까지만 해도 게임 최고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게임에 몰두하다가 결국은 고시를 포기하고 PC방 주인이 되는 경우도 생겨났을 정도였다.
 이제는 사회에서 판사, 검사, 변호사로 확약하고 있는 이들 중 이곳 신림동 고시촌의 PC방을 거쳐간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신림동 고시촌의 중심지인 서울대 앞 녹두거리를 급습, 고시생들의 게임 풍속도를 취재했다.

"고시촌이잖아요!"
신림동 고시촌에는 무려 50여개의 크고 작은 PC방이 밀집해 있다. 대충 훑어봐도 골목 골목에 있는 건물 하나당 PC방 하나는 있는 듯하다. ‘고시생들이 많이 찾느냐’는 질문에 PC방 주인장은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손님 가운데 90% 이상은 고시생이라고 보면 돼요."
밤 10시께 찾은 신림9동 파출소 인근의 한 PC방.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손님들로 가득하다. 집안에 있는 것처럼 츄리닝 차림에 점퍼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봐도 고시생 티가 난다.
이들이 주로 즐기는 게임은 ‘스타크’. PC방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보니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게임을 즐기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웬만한 게임은 이곳에서부터 검증을 받을 정도로 골수 게이머들이 많았던 예전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한번 오면 2∼3시간 정도 있어요. 게임을 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몰라 더 오래 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능하면 게임 시간을 줄이려고 하죠." 대여섯명이 모여 앉아 ‘스타크’ 팀플을 즐기던 고시생들의 대답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스타크’ 실력을 만만히 봤다가는 큰코 다친다. 국내 최고의 석학들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들이 플레이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신림동 고수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치밀하다.
"여건상 대회에 출전하지 못해서 그렇지 저희 PC방을 찾는 손님 가운데는 ‘스타’ 실력이 웬만한 프로게이머 못지 않은 고시생도 있어요. 30이 넘은 나이지만 좀 한다는 청소년들과 붙어도 웬만해선 지지않아요." 다소 좁아 보이기는 하지만 깔끔한 인테리어를 갖춘 또 다른 PC방에는 유난히 스타 고수가 많은 모양이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K씨는 고시생들의 스타 실력을 두고 자랑이 대단하다.
그런데 이 PC방에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 보였다. 3명의 고시생이 둘러앉아 PC모니터로 TV를 시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월요일 저녁이라서 그런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대장금’이 모니터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에게 ‘PC방에서 웬 TV냐’고 묻자 "이 부근에는 TV튜너가 내장된 모니터를 설치한 PC방이 많아요. TV를 보기 위해 PC방을 찾는 고시생이 많거든요"라고 설명한다.
설명을 듣고보니 고시원에 묻혀사는 고시생들에게 있어 PC방은 단순한 게임장이 아니었다. 잡념없이 오직 책과 씨름만 하는 이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많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인터넷을 해야하고 TV도 봐야 한다. 그러다보니 PC방은 이제 빨래방이나 음식점처럼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PC방 PC에는 TV수신카드 장착이 필수다.
그렇다고 요금이 비싼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훨씬 싸다. 다른 지역의 경우 시간당 1000∼1500원 정도를 받지만 이 곳에서는 대부분 시간당 800원을 받는다. 낮시간에도 정액제를 실시하는 곳이 적지 않다.
그러나 밤 12시를 넘기자 떠들썩하게 작전을 주고 받으면 게임을 즐기던 고시생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이들이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는 시간대는 저녁식사를 마친 이후부터 자정까지다. 그 시간 이후는 그날의 진도를 나가야 하는 올빼미 고시생들의 피크타임이라고 하니 이해가 간다.
이곳 근처에는 국내 최초의 보드게임방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봤다. 피크 시간에는 미리 예약을 해야만 입장이 가능할 정도로 이곳의 인기는 대단하다. 하지만 이미 12시가 넘어선 시간이라 그런지 빈 좌석이 많이 보였다. 보통 4∼5명이 팀을 이뤄 찾는 이 곳은 PC방과는 또다른 분위기 였다. 여기 저기서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게임 용어를 외치는 소리와 카드를 섞는 소리, 게임 도구를 흔들어 대는 소리 등이 뒤섞여 들려온다. 고시원을 벗어나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날려버려는 듯한 모습들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날 오후에 다시 찾은 신림동 고시촌은 우중충한 날씨만큼이나 썰렁하게 다가왔다. PC방에는 혼자 온 듯한 고시생 대여섯명이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사정은 보드게임방도 마찬가지 였다. 넓은 공간에 단 2팀만이 한쪽 구석에서 카드놀이를 즐기고 있을 따름이었다.‘여기가 어젯밤 그렇게 시끌벅적했던 곳 맞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른 분위기였다.
신림동 고시촌은 한국을 움직이는 두뇌집단이 꿈을 키우는 곳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이 곳에서 생활하는 고시생들 가운데 숨은 게임 고수가 많다는 얘기는 그만큼 이들이 지니고 있는 잠재력이 크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작은 단편이기도 하다. 그러나 처음에는 무모할 정도로 게임에 빠져들던 이들도 지금은 상당히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추어 게임고수, 여기 몰려 있소이다
 
‘고시생’ 하면 왠지 고리타분하고 곰팡이 냄새 나는 책 속에 파 뭍혀 살고 있을 것 같은 이미지가 떠 오른다. 특히 한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다는 신림동의 고시촌은 더욱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신림동 고시촌의 고시생들이 철없는 청소년들이 즐기는 것으로만 여겨졌던 ‘게임’을 자연스럽게 즐기며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만큼 게임은 특정 계층만이 즐기는 놀이가 아니라 초등학생에서부터 가장 근엄하다는 법조계에 이르기까지 이미 대한민국의 사회 곳곳에 퍼져나가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순기기자(soonk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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