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온라인게임 10년사 ‘도전의 세월’
 
최초의 온라인게임이라 할 수 있는 머드게임 ‘단군의 땅’이 등장한 이후 꼭 10년이 지났다. 돌이켜보면 변방에서 중심으로 우뚝 선 한국 게임산업사는 온라인게임의 발전사와 궤적을 같이 하고 있다. 10년이란 세월동안 줄기차게 이어진 온라인게임 개발 열기는 오늘날 한국을 ‘온라인게임 최강국’ 반열에 올려놓는 밑 거름이 됐다. 10년이라는 숫자는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세월을 반추하게 한다. 더 게임스는 ‘창간기획’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온라인게임 10년사를 주요 인물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지나간 10년을 되돌아보는 작업은 단순히 기록을 남기는 것을 넘어 다가올 10년을 예비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깊은 작업이 될 것이다.
 
온라인 게임의 태동
 
국산 온라인 게임 역사의 첫 페이지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태동됐다. 서구에서 유행하던 텍스트 기반의 온라인 게임을 즐기던 학생들이 새로운 버전을 만들면서 씨앗이 뿌려졌다. 1세대 온라인 게임 개발자 중 가장 먼저 이름이 언급될 사람도 카이스트 학생인 김지호씨다. 대학 3학년 친구 4명과 온라인 게임 ‘키트 머드(KIT MUD)’를 개발한 것이 국산 온라인 게임의 첫 출발로 기록될 수 있다. ‘키트머드’는 국산 온라인 게임의 효시로 언급될 ‘단군의땅’과 ‘쥬라기공원’의 모델이 됐다는 점에서 단순한 습작 수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쯤에서 국산 온라인 게임의 맹아를 뿌린 김지호씨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 보자. "재미 삼아 즐기던 머드게임에 흠뻑 빠지자 직접 게임을 개발하고 싶은 욕구가 들었습니다. 학내 전상망이 발달한 덕택에 통신 요금 부담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던 것도 큰 수혜로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 개발에 빠져 학교에서 제적 경고를 받은 아픈 기억도 있어요."
카이스트가 국내 온라인 게임의 메카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92년 최초로 구축된 학내 전상망의 역할이 매우 컸다. 초고속통신망과 PC방이라는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온라인 게임이 폭발적으로 확산된 것과 비교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이다. 인프라의 중요성이 새삼 느껴지는 대목이다. 네트워크가 기숙사까지 깔려 있어 심심풀이로 시작해 만든 게임들이 PC통신 등을 통해 서비스되면서 머드게임으로 발전한 것이다.
‘바람의 나라’ ‘리니지’ 등의 온라인 게임 신화를 만든 송재경씨와 넥슨 창업자 김정주씨, 태울의 조현태 사장 등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도 카이스트의 발달한 전산망이 큰 몫을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라인 게임의 효시 단군의땅, 쥬라기 공원
 
상용화된 국산 온라인 게임의 효시는 마리텔레콤의 ‘단군의땅’과 삼정데이타시스템의 ‘쥬라기공원’을 들 수 있다. ‘단군의땅’은 93년 9월 나우콤을 통해, ‘쥬라기공원’은 94년초 천리안을 통해 첫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이 게임의 핵심 개발자는 카이스트 출신의 김지호(단군의 땅), 송재경(쥬라기공원)이다. 이 시기 온라인 게임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업체는 단연 마리텔레콤이다. 마리텔레콤의 설립자 장인경씨는 김지호씨 등 카이스트의 젊은 개발자들과 온라인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이들을 규합해 회사를 설립했다. 그들이 처음 내놓은 ‘단군의 땅’은 PC 통신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 뿐만 아니라 해외에 수출돼 미국 NASA의 첨단 개발자들까지 게임을 즐겼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장인경 사장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94년은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통신친구로 만난 과학기술원 학부생들이 지나치게 머드게임에 몰입한 나머지 학사문제를 일으켜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뛰어다니다가 결국 창업까지 결행했습니다. 당시 모뎀사용자 백만명 중 40만명이 단군의땅을 즐겼을 정도로 인기도 폭발적이었죠. 하지만 수익구조가 열악해 직원들 월급조차 줄 수 없어 시장과 자본, 기술이 모여 있는 미국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단 아픈 기억도 있습니다."
 
게임에 그래픽을 입히자-‘바람의 나라’에서 ‘리니지’로
 
머드게임 일색의 온라인 게임 시장에서 세계 최초로 그래픽을 입힌 머그게임 ‘바람의 나라’가 등장한 것은 10년 남짓한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꼽을 수 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와 카이스트를 함께 다닌 김정주씨와 송재경씨 등이 연합해 만든 넥슨은 95년 12월 천리안을 통해 ‘바람의 나라’ 시범 서비스를 시작, 96년 4월 유료화를 단행했다. 세계 최초로 ‘머드+그래픽’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는 것만으로 일대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다. 비슷한 시기 카이스트 출신의 조현태 사장이 이끄는 태울도 머그게임 ‘파운데이션’을 개발, 유니텔을 통해 6월부터 서비스를 개시했다.
세계 최초로 그래픽을 입힌 온라인 게임을 개발했다는 것은 상징적 위상 만큼이나 어려움도 많았다. 넥슨의 설립자 김정주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고 미친짓 한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게임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하다 보니 좋은 개발자를 구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죠. 매번 학생 알바들로 임시 땜빵을 하면서 상당기간을 버텨야 했어요. 벤치마킹 대상이 없다보니 기술적인 문제에 봉착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한다는 표현에 가까웠죠. 무엇보다 네트워크를 전공한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머그게임의 성공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개발 뿐만 아니라 시장 분위기도 머그게임을 쉽게 반기지 않았다. 비싼요금 때문에 유저층은 마니아에 국한됐고 클라이언트 크기가 1.4MB나 되는 게임이 성공할 수 없다는 분위기도 팽배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눈부신 통신 기술의 발전은 2년후 머그게임의 성공시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니지’ 신화
 
97년 말 ‘리니지’의 탄생은 한국 온라인게임사의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바람의 나라’가 그래픽 위주의 온라인게임시대를 열었다면 ‘리니지’에 이르러 비로소 실시간 전투를 기본 테마로 한 오늘날 온라인 롤플레잉게임(RPG)의 뼈대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바람의 나라’ 개발 주역 송재경씨가 엔씨소프트에 합류해 개발한 ‘리니지’는 그동안 턴방식으로 진행되던 전투 모드를 실시간 액션 방식으로 바꿔놓는 ‘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리니지’는 혈전(혈맹들의 전투), 공성전 등 온라인 RPG에서만 구현할 수 있는 독특한 세계관을 구축하며 온라인 RPG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해 나갔다.
‘리니지’가 처음 등장할 즈음 미국에서는 리차드 게리엇(현재 엔씨오스틴 근무) 형제가 만든 ‘울티마온라인’이 상용화돼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리니지’는 게임 자체의 혁명성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인프라와 온라인게임에 대한 게이머들의 낮은 인식으로 한동안 시대를 앞서 간 게임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다.
SI사업을 잠시 접어두고 ‘리니지’ 개발에만 몰두했던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의 증언은 5년이나 지났지만 그 때의 심경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엿볼 수 있다. "한글과컴퓨터 시절 옛 동료들을 가끔 만나면 무슨 게임으로 돈을 벌겠다고 난리냐며 비웃음 아닌 비웃음을 보내곤 했죠. 늘어나지 않는 동시접속자수를 지켜보고 있느라면 이제 접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하루가 멀다하고 불끈 불끈 치솟았습니다."
실제 98년 9월 상용화에 돌입한 ‘리니지’는 동시접속자(동접) 1000명 고지를 넘는데 무려 4개월이라는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하지만 ‘리니지’는 그 해 12월 문화관광부와 전자신문이 주최한 ‘대한민국 게임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폭발적인 상승세를 탔다.
다시 김택진 사장의 증언으로 돌아가보자. "대한민국 게임대상을 수상하면서 ‘리니지’가 본격적으로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4개월이 걸리던 동접 1000명 증가 추이도 한 달로 앞당겨졌습니다. 10개월후 동접이 1만명을 돌파하면서 상황은 더욱 급박해졌죠. ‘동접 1만명’은 숫자가 주는 상징성을 떠나 규모의 마케팅에서도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했습니다. 결국 동접 1만명은 1년 2개월만에 10만명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불어 났으니까요."
‘리니지’의 성공은 엔씨소프트라는 한 기업의 성공담으로 끝나지 않았다. 게임이 미래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사람과 돈이 게임업계로 몰리기 시작했다. 엔씨소프트가 ‘코스닥 황제주’로 급부상한 것도 바로 이 때부터다.
 
국민게임 ‘포트리스’
 
‘리니지’가 성공하면서 이를 벤치마킹한 아류작이 넘쳐났다. 판타지풍의 세계관은 물론 조작 인터페이스, 심지어 공성전까지 그대로 베낀 온라인 RPG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한번 손을 잡으면 다른 게임으로 쉽게 옮길 수 없는 온라인게임의 특성 때문에 ‘리니지의 아성’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에피소드가 계속 추가되면서 방대해진 게임세계도 ‘리니지’ 독주체제를 더욱 공고히 했다.
‘리니지’ 아류작들이 고전을 면치 못한 2000년대 후반 CCR이 개발한 ‘포트리스’의 급부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95년 3월 대학생 벤처로 출발한 CCR가 97년 8월 ‘포트리스1’을 선보일 당시에만 해도 ‘포트리스’는 여전히 미완의 대기였다. 하지만 2년 뒤 리뉴얼버전 ‘포트리스2’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3개월만에 회원이 40만명을 돌파했고, 매달 회원이 100만명씩 폭주하는 열풍이 이어졌다. 2000년 12월 650만명이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포트리스’라는 이름 앞에는 ‘국민게임’이라는 타이틀이 자연스럽게 따라 붙었다.
하지만 CCR는 늘어나는 회원과 정비례해 비용은 늘어났고 그 만큼 수익모델에 대한 고민도 깊어갔다. 윤석호 사장은 당시 상황을 배수진을 친 심정이었다고 표현한다. "포트리스의 성공은 마우스 클릭 한번이면 탱크들의 박진감 넘치는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점이 대중들에게 먹혀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회원들이 늘어나면서 서버 등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유료화 모델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리니지’나 ‘영웅문’ 등이 고집한 월정액제를 실시한다면 게임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응답했거든요. 끊임없는 회의가 이어졌고, 결국 우리는 일반인에게는 무료, PC방에는 유료라는 다소 도발적인 모험을 감행해야 했습니다."
예견했던 대로 PC방은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650만명이라는 ‘유저 파워’는 막강했다. 고객 유치라는 현실적인 고민에 봉착한 PC방 업주들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포트리스2’ 사용료를 낼 수밖에 없었다.
‘배틀마린’ ‘워터크래프트’ 등 ‘포트리스 아류작’도 이 때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온라인게임이 ‘리니지’처럼 마니아층을 공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도 확산됐다.
 
한게임 열풍
 
2000년 ‘포트리스’가 한참 주가를 올리던 시절, 국내 최초의 게임포털을 표방한 ‘한게임’도 온라인게임 신드롬의 한축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고스톱, 포커 등 카드류 게임을 온라인상에 그대로 옮겨 놓은 ‘한게임’은 직장인들의 풍속도를 바꿔놓기도 했다. 점심시간이나 휴식시간이면 "한게임 한판할까"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포트리스’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였다면 ‘한게임’은 20∼30대의 젊은 직장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셈이다.
하지만 ‘한게임’ 역시 엄청난 우여곡절 끝에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삼성SDS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김범수 사장은 98년 서울교대 앞 조그만 오피스텔에 사무실을 열었지만 사표가 수리되지 않아 9개월 가량을 낮에는 삼성SDS로, 밤에는 ‘한게임’ 사무실로 출근하는 ‘이중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김범수 사장은 한게임이 처음 이륙할 당시를 돌이켜보면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게임이 나오기까지는 캐시카우가 필요했어요. 비용을 아끼기 위해 개인적으로 운영하던 PC방으로 사무실로 옮기기도 했고, 자체 개발한 PC방 관리프로그램을 전국 PC방에 파는 일종의 PC방 프랜차이즈 사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한게임’을 오픈했을 때는 밀려드는 유저 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서버를 증설해야 했습니다. 서버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다른 인터넷 기업에 ‘한게임’을 팔아 유저를 분사시켜야 했을 정도니까요."
‘한게임’ 성공사에는 2001년 ‘네이버’와의 합병을 빼놓을 수 없다. 게임 개발에만 전념했던 ‘한게임’의 맨파워로서는 비대해진 회사를 합리적으로 경영할 노하우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경영 노하우와 자본력이 절박했던 ‘한게임’과 킬러콘텐츠가 아쉬웠던 ‘네이버’의 결합은 이후 인터넷 벤처기업 M&A의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로 평가받기도 했다.
‘한게임’으로 대변되는 ‘게임포털 성공신화’는 후발주자인 ‘넷마블’과 ‘피망’의 잇딴 성공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3D 온라인게임시대
 
2002년 한일월드컵 열기는 온라인게임 열풍도 잠재울 듯했다. ‘리니지’ ‘한게임’ ‘포트리스’ 등 각 분야 게임들의 아성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2001년 ‘3D 그래픽’이라는 새로운 테마를 들고 나온 ‘뮤’ ‘라그하임’ 등 신흥강호의 돌풍은 게이머들의 안목을 조금씩 바꿔놓고 있었다. 특히 온라인게임의 그래픽도 PC게임에 버금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웹젠의 ‘뮤’는 전혀 흔들릴 것 같지 않던 ‘리니지 아성’을 위협할 기세였다. 2001년 연말에 오픈 베타서비스를 시작한 뒤 5개월만에 동시접속자가 2만명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웹젠 창업주 이수영 사장의 회고는 무척 담담하다. "개발기간만 지켜진다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죠. 온라인게임의 특성은 물론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 완벽한 학습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3D 온라인게임이라는 차별화 포인트만으로도 우리는 5년 이후의 웹젠의 모습까지 그려 놓은 상태였습니다."
10개월간 베타서비스를 마친 뒤 유료화를 단행한 ‘뮤’의 첫 달 수입은 30억 여원에 달했다. 3년간 투자한 개발비를 한달만에 회수하며 바로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순간이었다. 더구나 웹젠은 ‘뮤’ 베타서비스 16개월 만에 코스닥 입성이라는 빛나는 ‘전과’를 세우며 ‘제2의 게임 엑소더스’를 불러왔다.
‘라그하임’ ‘라그나로크’ 등 3D 그래픽을 표방한 게임들의 강세가 지속되면서 온라인게임은 본격적인 3D시대를 맞게 됐다.
 
새로운 역사들
 
3D 온라인게임시대가 열린 2002년은 ‘국산 온라인게임의 수출 원년’이기도 하다. 2000년 후반부터 ‘리니지’ ‘레드문’ 등 몇몇 게임이 대만과 중국에서 서비스됐지만 2002년에 이르러 해외 진출은 봇물을 이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오픈 된 온라인게임은 몇 개월만 지나면 중국이나 대만에서도 론칭될 정도로 바이어들의 표적이 됐다.
2002년 10대 문화산업 수출순위에서 게임이 인쇄와 애니메이션 등 전통적인 수출효자를 제치고 정상을 차지한 것은 이를 잘 입증하고 있다. ‘온라인게임 종주국’이라는 말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부터다.
‘국내용’이 아닌 ‘세계무대’를 겨냥해야 한다는 게임업체들의 각성도 시작됐다. 2003년 또 하나의 신화를 작성한 ‘리니지2’를 시작으로 ‘아크로드’ ‘RF온라인’ 등 개발비와 마케팅비가 100억원을 훌쩍 넘는 블록버스터 개발이 활기를 띤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 온라인게임 1세대 장인경 사장의 고백을 들어보자. 그녀의 고백은 새로운 역사를 예비할 후배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돌이켜보면 국내 온라인게임시장은 IMF에 급격히 늘어난 PC방을 통해 급팽창했습니다. 10년간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려오다 보니 선점에 의해서 돈을 번 회사나 그렇지 않은 회사나 심각한 성장통(rapid growing pain)을 앓을 수밖에요. 아주 불안정한 구조가 지속 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국지전이나 작은 전투에서 이기고 세계대전에서 진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이젠 숨을 고를 때입니다. 국가전략, 산업전략, 기업전략을 총체적으로 다시 짜지 않으면 자칫 사상누각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장지영기자(jyaj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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